서지현 검사가 방송에 나와 자신이 검찰 간부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한 게 지난 1월29일이다. 그날로부터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도 당했다”는 여성들의 폭로가 이어졌다. 고은 시인이나 이윤택 연출가를 비롯한 문화적 권력을 가진 명망가를 비롯해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같은 정치인의 성폭력, 그리고 청주대 교수였던 배우 조민기 씨가 수년간 학생들을 성추행했다는 사실 등이 폭로돼 충격을 줬다. 매일같이 유명인들의 성폭력 의혹 등이 쏟아져 놀라울 뿐이다. 언론은 피해자들의 폭로를 소비만 한다. 피해자와 가해자간의 진실공방, 그리고 미투로 불거진 부작용 등을 집중적으로 보도한다. 펜스룰로 오히려 여성들이 불리해진다는 보도는 정말 짜증날 정도다. 이뿐이 아니다. 왜 오래전 일을 이제 와서 꺼내느냐고 피해자들을 몰아세우기도 한다. 미투 공작설 운운하는 김어준 식의 대응도 우리 사회가 갈 길이 참 멀다는 절망감마저 갖게 한다.
사실 미투 운동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예전에도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문제제기를 해왔다. 그때마다 구조적인 모순을 들여다보지 않고 피해자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미투 운동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나는 미투 운동이 많은 걸 변화시키길 바라고 또 바란다. 단순하고 절박한 바람이라고 욕먹을 수 있겠지만 우리 딸들을 위해서라도 제발 좀 바뀌면 좋겠다. 우리 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인 차별과 혐오, 폭력에 노출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전에 고백해야겠다. 나 역시 젠더 폭력에 참 무지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충북민언련에서 인터넷 방송을 한 적이 있다. 청주시청내의 조직문화를 비판한게 주요 내용이었다. 당시 청주시청 공무원의 성희롱 사태가 있었다. 우리는 방송에서 그 이야길 꺼내며 청주시청 내의 조직문화를 비판했지만 피해자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실수를 범했다. 피해자 입장에선 어떤 식으로든 다시 이야기되는 걸 원치 않았을 거란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론적인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어도 살아가면서 몸으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아이를 낳기 전과 후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경험한 만큼 알게 되고 깨닫게 되는 둔한 사람인지라 다른 이의 경험을 꾸준히 읽어내려고 애쓴다. 그래야 전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 될 테니까. 미투 운동으로 여러 폭로가 계속되던 그 즈음에 내가 읽은 책은 정희진의 <혼자서 본 영화>다. 몸으로 책읽기를 한다는 정희진 선생의 영화 읽기다. 여성주의 ‧평화 연구자인 정희진의 이야기만큼 지금 시기에 딱 맞춤인 텍스트가 또 있을까 싶다. 배울 점이 너무나 많다. 같은 영화를 봐도 여성주의 연구자인 정희진의 눈으로 해석해 준 지점들이 그렇다.
정희진은 영화 읽기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제도가 가족임을 짚어내며 가부장제 사회가 원하는 길들여진 여성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여성을 영원한 사랑에 가두어 놓고 여성의 욕망이나 성욕은 비정상적이고 탈정치적인 문제로 여겨지는 현실을 꼬집는다. 영화 속 여성들이 주체가 아니라 남성에 의해서 정의되고 도구화되는 현실을, 남성의 입장에서만 해석하는 현실을 짚어낸다.
피해자들의 폭로가 계속 돼서 그런지 성폭력 가해자를 찾아가 만나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 <끔찍하게 정상적인>에 대한 부분도 인상 깊다. 이 영화의 감독 셀레스타 데이비스는 여섯 살 때 이웃에 사는 아버지의 친구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영화를 공부했고 자신과 자신의 언니를 성추행한 가해자를 찾아가 만나는 내용을 영화에 담았다고 한다. 25년 동안 벼르고 벼르다 가해자를 찾아갔지만 막상 제대로 할 말을 하지 못했던 감독은 가해자의 뻔뻔한 태도에 “그간 내게 떠넘겼던 당신 짐이나 가져가”라고 외쳤단다.
피해자는 25년을 괴로워했는데 가해자는 죄의식 없이 아무렇지 않게 그 시간을 살았다. 대부분의 가해자가 그랬듯이…. (이 대목에선 안희정 전 지사를 고발한 김지은 씨의 고통스런 얼굴도 떠오른다.) 정희진은 자신이라면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나도 그렇다. 그렇기에 피해자들의 용기에 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미투는 피해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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