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위에서부는바람14

그리웠던 시선으로 바라보는 지금 그리웠던 시선으로 바라보는 지금잔디 # 봄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하염없이, 눈이 내린다. 눈 내리는 화요일 오전. 골목을 걸어 갤러리 마당 구경에 나섰다. 아직 이름을 알지 못하는 꽃들이 고개를 조금 들고 피어나고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눈을 받치고 선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숨 참으며 사진도 찍고 눈 때문에 꽃이 얼지 않을까 걱정도 해보고 내리는 눈 속에 서서 고요히 눈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갤러리 정기휴일이라는 안내글을 보고 돌아서서 집에 가려하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금동이가 다가와 숨을 거칠게 쉰다. 곧이어 금동이를 부르는 갤러리 언니의 목소리. 언니가 정기휴일 안내문을 떼고 “니노씨 커피 한잔 하고 가”라는 엄청 반가운 말씀을 건네신다. 갤러리 한 켠에 바깥풍경이 훤히 보이는 환한 자리에 앉아.. 2025. 3. 25.
경이, 도경 경이, 도경잔디  고등학교 3년 내내 경희와 한 반에서 지냈다. 경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명이어서 우리는 3번 경희, 4번 경희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 사람은 보통의 키보다 작은 키였고, 한 사람은 매우 큰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우리 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소매와 바지 자락을 걷고 관여하는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그런 그를 말 없이 돕거나 지금은 오지랖을 멈출 때야 라고 눈빛으로 기어를 변환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를 때 안전지대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5번 김도경이었다.  김도경은 우리 반에서 눈싸움의 1인 자였는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상대가 눈을 끔뻑할 때까지 결코 눈을 감지 않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자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눈싸움 시작과 동시에.. 2025. 2. 25.
연말결산 연말결산잔디 올해 늦여름, 문득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쓴 커피가 혀에 닿고 목구멍을 지나 식도를 거쳐 위장에 도착했을 때쯤, 몸에서 기억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 이 맛은 스무 살의 봄에 처음 맛본 자판기 블랙커피 맛과 닮았다. 물론 향은 에스프레소 쪽이 짙고 목 넘김도 훨씬 감미로웠으나 스무 살의 그해 봄, 아직 겨울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그때, 커피 맛을 잘 모르면서도 햇살 들어오는 동아리방에 혼자 앉아서도, 엄마랑 여섯 시간 떨어진 거리에서 처음 살게 되어 느끼는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도, 낯선 또래들과의 자유로운 대화에서도 백 원짜리 커피가 주던 잔잔한 위로는, 아직 커피보다 삶이 더 쓰다는 걸 알지 못했던 그때의 나를 지금 여기로 불러온다. 물론 쓴맛과 함께 어우러진 신맛과 약간.. 2024. 1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