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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어떤 기다림

by 인권연대 숨 2025. 9. 25.
어떤 기다림
잔디

 

빨래를 널으러 뒷마당에서 빨랫줄로 걸어가는 짧은 거리에도 내 등 뒤에서 툭, 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주홍빛 해가 하나 뒷마당에 깔아놓은 파쇄석 위에 떨어져 있다. 해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꼭지를 떼어내고 반을 갈라 조금 먹어본다. 어제 먹은 것보다 엊그제 먹어본 것보다 달다. 아무도 부르지 않고 혼자만 먹는다. 먹는 동안에도 아까 해 떨어진 옆자리에 해가 또 떨어진다. 냉큼 주워 조금 맛보고 다시 혼자만 먹는다. 온종일 뱃속에 든 두 해님 덕분에 온기가 그득하겠다 싶다. 그래도 가을은 기어이 돌아오고야 말아서 퇴근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주홍빛 해의 빛깔을 닮은 하루에 한 번뿐인, 노을이를 놓치기 일쑤다. 그래서 피부가 진짜 가을이가 돌아왔나 보다 느끼던 날부터는 퇴근할 때, 동료들과 하루의 노고를 쓰다듬는 농담 없이 회사문을 거침없이 열고나와 확 트인 곳을 찾아 바라본다. 아가가 자라는 것이 찰나의 순간처럼 지나가듯 노을이 또한 허튼 시선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의자의 방향을 바꾸어가며 노을을 바라보던 어린왕자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아니 그 전에 어린왕자의 모습 속에 담긴 쌩텍쥐페리님의 노을 바라보기 장면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그는 몇 번의 노을을 어린왕자라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 속에 담아놓고 싶었던 것일까? 가을은 노을과 함께 깊어져만 갈 것이다.

 

여름부터 준비한 부모님 힐링 프로그램이 우여곡절을 끝내고 시작되었다. 거리에 걸린 현수막에 쓰여진 어느 대학의 교수님을 모시고 우리 교육과 비슷한 날짜에 시작하는 부모교육 주제가 부모님의 자기 돌봄인 것을 보면서 우리 공동체가 준비한 주제가 현재의 흐름과 함께 하는 흐름이어서 헤헷, 기뻤다. 부모님 열 분을 모시고, 담당자와 팀장님 그리고 강사인 나까지 열 세 명의 작업.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간단히 이 공부를 선택하게 된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고, 4회기를 마치고 난 후의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4회기 동안 자신이 불리우고 싶은, 그 이름으로 상대들이 나를 불러줄 때 기쁨이나 좋은 느낌이 느껴지는 이름을 정하고 소개한다.

 

한 바퀴 돌고나면 아무리 처음 만나는 사이이더라도 약간의 연결감을 느끼게 된다. 이 연결감으로 들은 대로 말하기, 내가 말한 대로 상대가 들려 줄 때의 느낌을 느껴본다. 이름하여 들은 대로 말해요”. 두 명씩 짝지어 활동하고, “나는 조약돌이고, 나는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는 걸 좋아하고, 따뜻한 커피를 마실 때 행복해요.” 말하면 상대가 , 당신은 조약돌이고, 노을 지는 하늘 바라보기를 좋아하고, 따뜻한 커피 마실 때 행복하군요.”라고 다시 돌려준다. 그러고 나면 상대가 표현을 하면 내가 상대의 이야기를 다시 돌려주고, 이렇게 서너 명쯤과 이런 시도를 한 다음 자리에 앉는다. 이쯤 되면 사실 분위기가 술렁술렁. 지금의 느낌을 느낌 단어 목록에서 찾을 때, 다양한 느낌 단어가 들려온다. 그 느낌을 돌아가면서 말한다. 물론 이야기를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선택~! 이야기를 간직하고 싶다면 패쓰라고 말할 수 있다. 진지하게 패쓰하는 사람도, 경쾌하게 패쓰하는 사람도, 패쓰했다가 마음이 바뀌어 느낌을 말하는 것도 다 허용이다. 패쓰하는 사람은 패쓰하는 사람대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이야기하는 사람대로 자신을 인식하는 에너지를 확인한다면 오케이. 인식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오케이. 이렇게 두 바퀴 돌고 나면 우리가 원래 어떤 존재였는지 돌아본다.

 

우리에겐 태어난 지 막 백 일 지난 아가야가 함께 있었다. 울고, 먹고 자는 걸 반복했던 우리의 아가야 시절.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안아주었던 손길을 회상하여 본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사랑받았던 존재였던 걸 깊이 따스하게 기억해 낸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사랑스럽고 소중하고 존귀하며 실수할 권리를 지니고 있고, 있는 그대로 소중한 존재다.”라고 답하는 시간을 음미하여 본다. 울기도 하고, 좀 어울리네 싶기도 하고, 나에겐 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하기도 하고, 여러 느낌들을 좀 느슨하게 느껴본다. 머무르다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지금 갖게 된, 반갑지 않지만 내가 풀 수밖에 없는 나의 숙제를 확인한다. 일상에서 사랑과 안전감이 위배될 때 내가 느끼는 일차적 감정(핵심 감정) 단어들을 확인해 보고, 그 생각이 반복되어 마음이 힘들 때 반복하게 되는 나의 행동들, 자동화된 패턴을 살펴본다. 나를 살리기 위해 내가 반복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생각들, 행동들이 나에게도, 혹은 나 자신에게 가장 힘듦이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살아오는 시간동안 힘들고 외로웠던 길 위에서 앉지도 못하고 울고 서 있던 지친 나를 위로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 순간의 한계 안에서도 늘 최선의 선택을 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나를 한껏 안아준다.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나에게서 등 돌리고 있던 나의 기다림을, 등 돌릴 수밖에 없었던 나의 오랜 기다림을 안아준다.

 

포옹하는 순간이 지나가고,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책을 읽으며 자신에게 다가온 문장을 단체톡방에 공유하며 지내다 일주일 만에 우리는 오늘 만날 것이다. 낮에 각자의 역할을 다하고, 서둘러 아이들의 저녁을 차리고, 허둥지둥 나를 보살피는 자리로 돌아와 앉아 일주일을 살아온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언제나 다시 오는 노을을 맞이하듯 우린 또 맞이하고, 또 맞이하며 이제야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아이에게 다시 배우며, 노을 아래 언젠가 잃어버린 반짝이는 조약돌을 찾아 나에게 건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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