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51 경이, 도경 경이, 도경잔디 고등학교 3년 내내 경희와 한 반에서 지냈다. 경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명이어서 우리는 3번 경희, 4번 경희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 사람은 보통의 키보다 작은 키였고, 한 사람은 매우 큰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우리 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소매와 바지 자락을 걷고 관여하는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그런 그를 말 없이 돕거나 지금은 오지랖을 멈출 때야 라고 눈빛으로 기어를 변환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를 때 안전지대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5번 김도경이었다. 김도경은 우리 반에서 눈싸움의 1인 자였는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상대가 눈을 끔뻑할 때까지 결코 눈을 감지 않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자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눈싸움 시작과 동시에.. 2025. 2. 25. 연말결산 연말결산잔디 올해 늦여름, 문득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쓴 커피가 혀에 닿고 목구멍을 지나 식도를 거쳐 위장에 도착했을 때쯤, 몸에서 기억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 이 맛은 스무 살의 봄에 처음 맛본 자판기 블랙커피 맛과 닮았다. 물론 향은 에스프레소 쪽이 짙고 목 넘김도 훨씬 감미로웠으나 스무 살의 그해 봄, 아직 겨울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그때, 커피 맛을 잘 모르면서도 햇살 들어오는 동아리방에 혼자 앉아서도, 엄마랑 여섯 시간 떨어진 거리에서 처음 살게 되어 느끼는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도, 낯선 또래들과의 자유로운 대화에서도 백 원짜리 커피가 주던 잔잔한 위로는, 아직 커피보다 삶이 더 쓰다는 걸 알지 못했던 그때의 나를 지금 여기로 불러온다. 물론 쓴맛과 함께 어우러진 신맛과 약간.. 2024. 12. 26. 춤 춤 잔디 올해는 어쩔 수 없이 전에 다니던 성당에 두 번 다녀왔다. 두 번의 장례미사. 한 번의 악수, 한 번의 포옹. 한 번의 봉투와 한 장의 손수건. 한 번의 오열, 한 번의 흔한 눈물. 어떤 죽음은 나에게 깊은 슬픔으로 다가와 가슴이 미어져서 미사가 끝난 후 유가족을 버얼건 눈으로 마주하기가 힘들었고, 어떤 죽음은 나에게 지치고 오랜 고통과의 이별로 다가와 자유로움으로 이어져, 그저 담담히 성당 뒤켠에 서서 눈으로 검은 옷을 입은 유가족의 등을 쓰다듬을 수 있었다. 어떤 죽음은 더 이상 그를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다는 사실이 너.. 2024. 11. 25. 이전 1 2 3 4 ··· 1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