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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현경이랑 세상읽기46

기름떡볶이 효과 기름떡볶이 효과박현경(화가, 교사) 0.많고도 많은 일을 겪어 왔지만 올해를 대표하는 장면은 이거다. 1.종일 불안과 분노와 짜증에 시달리며, 언제라도 치솟을 듯한 그 감정들을 가까스로 누르며, 장학사랑 통화하고 교장이랑 통화하고 기자랑 통화하며 이 일 저 일을 처리하던 내가, 드디어 퇴근을 한다. 비는 오는데 우산이 없다. 그냥 비를 맞으며 버스 정류장까지 걷는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서 내린다. 아까보다 조금 더 굵어진 빗방울을 맞으며 수암골 언덕을 걸어 올라간다. 마침내 집에 도착. 번호키로 문을 따고 들어서자마자 고양이 왕순이, 봉순이가 와다다다 내게로 달려온다. “잘 있었어? 언니 오늘 힘들어. 배고파? 언니 보고 싶었어?” 말을 걸며 밥그릇에 사료를 채워 준다. 젖어 버린 외출복을 벗고 목 .. 2025. 12. 26.
내 남자 이야기 내 남자 이야기박현경(화가, 교사) 격렬한 섹스 후에 그 남자가 말했다.“나랑 살아 줘서 고마워요.”나는 대답했다.“고맙긴요. 이건 당신이 밑지는 일이에요.”“아니에요. 나랑 살아 줘서 고마워요.”“아니, 이건 백 퍼센트 당신이 밑지는 일이라니까요.”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자, 나는 고지(告知)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내가 하자(瑕疵) 많은 인간이란 걸 당신한테 분명히 밝혔습니다. 나중에 속았다며 원망 말아요.’2015년 어느 날이었다. 2025년 현재, 나는 여전히 그 남자와 살고 있다. 그에게 지난 10년은 그때 내가 했던 말이 빈말이 아닌 온전한 사실적시(事實摘示)였음을 숱한 체험을 통해 깨닫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 ‘숱한 체험’의 가벼운 예를 들면 이렇다. 내가 발을 굴러 가며 그에게 화를 .. 2025. 11. 26.
글쓰기에 대한 소고(小考) 글쓰기에 대한 소고(小考)박현경(화가, 교사) 언제나 글쓰기를 사랑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물론 내가 싫어하는 글쓰기도 있다.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학교생활기록부 특기사항을 쓰는 건 참 싫은 일이었다. 대학 입학 관계자들은 내가 써 놓은 문장들을 참고해서 학생을 평가할 것이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교사로서 학생의 대학 입시에 초연하기는 힘들다. 그러니 생활기록부 작성은 그 많은 분량을 쓰는 내내 단어 하나하나마다 누군가의 평가를 끊임없이 의식해야 하는 지극히 종속적이고 타율적인 행위가 된다. 즐거울 리 만무하다. 내가 정말 쓰고 싶은 글에 활용해야 마땅할 나의 어휘력과 문장력과 시간과 노력을 (정작 나 자신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 대학의 눈치를 보면서, 대학에 예쁘게 보이기 위해 쏟아부어.. 2025. 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