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현경이랑 세상읽기55 '너'의 검정 보자기 '너'의 검정 보자기 박현경(화가, 교사) 눈을 뜨면 어김없이 가슴을 덮쳐 오는검정 보자기가 두려웠습니다햇발이 환할수록 몸 속엔 자꾸자꾸검디검은 그늘이 밀려들어 왔습니다새들이 눈이 부셔 비명을 내지를 때나는 가위눌렸습니다 검정 보자기 그늘깜깜하고 물큰한 슬픔 속 나를만질 수 있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대를 만났을 때 이 어둠 팔랑날아가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날기엔 아직 너무 무거운 물기난 쓰디쓰게나마 고갤 끄덕입니다깜깜하고 물큰한 슬픔 속 날 만지는그대 손끝에서도 나옵니다 모락모락검정 보자기 물밀듯이 내 가슴을 덮치고눈 감아도 온몸 속 넘실대는 밤바다하염없이 검디검은 이 그늘이 내 숨입니다젖은 검정 보자기가 바로 내 살입니다 - 졸시, 검정 보자기 그늘> 나의 메모에 따르면 2004년 10월 8일에 이.. 2026. 9. 28. 새끼발가락에게 들은 이야기 새끼발가락에게 들은 이야기 박현경(화가, 교사) 1.놓친 핸드폰이 왼발 위에 떨어졌다.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핸드폰 모서리에 세게 부딪힌 새끼발가락이 빨갛게 부풀었다. 지난 주 화요일 밤의 일이다.수요일과 목요일, 다리를 절었다. 새끼발가락 하나 다쳤을 뿐인데 균형 잡기가 힘들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왼발 전체가 아팠다. 앉아서 업무를 할 때도 욱신욱신, 내내 신경이 쓰였다. 하도 아파서 신발을 벗어 보니, 새끼발가락은 보라색이 돼 있었다. 새끼발가락을 다치니 온 신경이 새끼발가락에 집중했다. 늘 이런 식인 것 같다. 치아가 하나 아프면 온 신경이 그 치아에 집중한다. 손가락 하나를 다치면 온 신경이 그 손가락을 향한다. 몸 어딘가에 상처가 생기면 온 신경이 그 상처에 매달린다.조그만 환부에 그토.. 2026. 8. 25. 봉순이는 봉순이는박현경(화가, 교사) 봉순이는 고등어다. 우리 집에 사는 코리안숏헤어 고등어 고양이다. 이마 아래 얼굴과 옆구리와 네 다리와 발은 하얗다. 이마 위쪽으로 두 귀와 뒤통수를 지나 등허리를 거쳐서 길고 우아한 꼬리까지는 고등어 등 색깔이다. 분홍 코 양옆으론 엷은 갈색 반점이 있다. 수염은 하얗고 길고 빳빳하다. 눈동자는 에메랄드 빛깔이다. 봉순이는 2020년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시 사창동 어느 골목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4개월쯤 됐을 때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골반을 다쳤다. 구조돼서 안락사당할 위기에 처했다가 우리 집에 오게 됐다. 우리 집엔 기다란 회색 털을 지닌 페르시아 귀족 혈통 왕순이가 오래전부터 살고 있었다. 귀부인 왕순이를 처음 봤을 때 꾀죄죄한 봉순이는 무척 반가워했다. 먼 이.. 2026. 7. 24. 이전 1 2 3 4 ··· 1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