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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현경이랑 세상읽기

글쓰기에 대한 소고(小考)

by 인권연대 숨 2025. 10. 27.
글쓰기에 대한 소고(小考)
박현경(화가, 교사)

 

언제나 글쓰기를 사랑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물론 내가 싫어하는 글쓰기도 있다.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학교생활기록부 특기사항을 쓰는 건 참 싫은 일이었다. 대학 입학 관계자들은 내가 써 놓은 문장들을 참고해서 학생을 평가할 것이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교사로서 학생의 대학 입시에 초연하기는 힘들다. 그러니 생활기록부 작성은 그 많은 분량을 쓰는 내내 단어 하나하나마다 누군가의 평가를 끊임없이 의식해야 하는 지극히 종속적이고 타율적인 행위가 된다. 즐거울 리 만무하다. 내가 정말 쓰고 싶은 글에 활용해야 마땅할 나의 어휘력과 문장력과 시간과 노력을 (정작 나 자신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 대학의 눈치를 보면서, 대학에 예쁘게 보이기 위해 쏟아부어야 하다니, 글쓰기라는 소중한 행위가, 그리고 내 존재 자체가 모독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생활기록부를 쓰다 보면 몹시 슬펐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최선의 최선의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쥐어짜 가면서 쓰고 쓰고 또 쓰고 고쳐 썼다. 그렇게 겨우 생활기록부 마감을 하고 나면 손목이 나가고 몸살이 나서 몸져눕곤 했다. 글쓰기는 모독당하고 나는 소모당했다. 그래서 누군가 명명했다. 교사의 ()’을 조금씩 기부하는 게 생기부’(생활기록부)라고.

 

올해와 내년은 전교조 충북지부 사무처장으로 일한다. 이 두 해 동안은 학교 현장에서 근무하지 않으니 생활기록부를 쓸 일이 없다. 그렇지만 글쓰기의 양은 현장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많다. 내가 주로 쓰는 글의 종류는 보도자료, 성명서, 취재요청서, 기자회견문 등이다. 지부에서 대변인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들도 내가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쓰는 글이 아니고,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 써야 하는 글, ‘때문에 쓰는 글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글들을 쓰면서는 전혀 슬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혹 주제에 따라 쓰기 어렵다고 느낀 일은 있어도 쓰기 싫다고 느낀 일은 없다. 왜일까? 눈치 보지 않고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쓰고 싶은 내용내게 쓰도록 요구되는 내용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몹시 희귀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양심이 추구하는 방향과 자신이 속한 조직이 추구하는 방향이 일치해야 가능한 일이다. 감사하게도 지금 나의 상황이 그러하다.

 

사무처장이 되고 나서 쓴 한 편 한 편의 글이 모두 소중하지만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글은 단연 44일 금요일에 써서 배포한 성명서 <윤석열 파면을 환영한다>이다. 43일 목요일에 상경해 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 참석한 뒤 헌법재판소 앞에서 남편 그리고 전교조 동지들과 키세스단이 되어 철야농성을 했다. 남편이 4일 새벽 일찍 청주로 내려가고 나는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아이패드로 성명서를 썼다. 부디 이 성명서를 배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떨리는 마음으로 한 문장 한 문장 썼다. 그리고 오전 1122, 마침내 윤석열 파면이 선고되자 동지들과 얼싸안고 춤추다가 축제 같은 행진을 하는 와중에 아이패드를 펼쳤다. 새벽에 써 놓은 성명서를 기자들에게 전송하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길바닥에서 써서 길바닥에서 전송한 성명서, 나의 기쁨과 조직의 기쁨이 함께 녹아든 성명서였다.

 

64일 수요일에 발표한 <전교조 충북지부가 이재명 대통령에게 바란다>라는 성명서 역시 기억에 남는다. 새 정부에 바라는 교육 정책의 굵직한 방향을 제시한 글인데, 이 글을 쓸 때 역시 한 개인인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조직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의 방향이 다르지 않아, 신이 나서 마음껏 쓸 수 있었다. 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나서는 내가 존경하는 후배로부터 , 성명 너무 잘 나왔다. 전 지역 교원단체 중에 제일 잘 쓴 듯. 박현경 선생님이 사무처장인 지부인 게 자랑스럽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받고 가슴이 벅찼던 게 기억난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양심이 추구하는 방향과 자신이 속한 조직이 추구하는 방향이 일치하고 그리하여 내가 쓰고 싶은 내용내게 쓰도록 요구되는 내용이 일치하는 것은 매우 희한하고 귀한 경우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글쓰기의 기회를 최대한 누릴 것이다. 보도자료와 성명서, 취재요청서와 기자회견문을 쓰느라 불을 밝히는 새벽과 늦은 밤을 즐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가 무료로 초과 노동을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일기나 편지 같은 사적인 글쓰기가 아닌, 직업적이고 공적인 글쓰기도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한 이상, 나는 다음 세 가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나는 다시 생활기록부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모독적이고 소모적인 글쓰기, 슬픈 글쓰기를 다시 참아 낼 수 있을까? 그리고 둘째, 어떻게 하면 생활기록부 쓰기도 즐거운 글쓰기, 양심과 신념에 부합하는 글쓰기가 될 수 있을까? 대학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애쓰는 글쓰기가 아니라 교사 자신의 관찰과 평가, 진단을 솔직담백하게 담은 글쓰기가 될 수는 없을까? 마지막으로 셋째, 이런 의문들은 나만의 것일까? 나와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나와 같은 의문을 품는 교사 동료를 나는 만나고 싶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의문에 대한 답은, 아마도 시간이 가르쳐 줄 것이다. 내일 아침 맑은 정신으로 기자회견문을 쓰기 위해 이 글은 여기서 이만 맺기로 한다.

박현경_삶 26, 시아노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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