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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현경이랑 세상읽기

내가 사랑하는 음식

by 인권연대 숨 2025. 6. 24.
내가 사랑하는 음식
박현경(화가, 교사)

 

1. 남편의 짜파구리

긴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온다. 남편도 곧 퇴근해 집으로 온다. 초집중 상태로 하루를 보낸 끝, 몸이 노곤하고 눕고만 싶다. 배만 안 고팠다면 그대로 누워 버렸을 터.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조리를 시작한다. 오늘의 메뉴는 짜파구리. 물을 끓이고 너구리와 짜파게티 봉지를 뜯어 면을 끓는 물에 넣는다. 너구리 면을 짜파게티 면보다 더 먼저 넣어야 한다. 너구리 소스는 절반만, 짜파게티 소스는 한 개를 다 쓴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 달구고 대파를 송송 썰어 볶는다. 계란 후라이를 부친다. 내가 반숙을 좋아하므로 반숙 후라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남편이 한다.

완성된 짜파구리를 그릇에 담고 볶은 대파를 고명으로 얹는다. 반숙 계란 후라이도 얹는다. 너무 맛있어 아껴 가며 먹는다. 매콤하면서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랑 쫄깃쫄깃한 식감이 일품이다. 거기에 가끔 씹히는 대파의 진하고 찐득한 풍미가 최고다.

먹은 뒤 설거지는 내가 한다. 이렇게 최소한의 양심만 지키고 산다.

 

2. 동북볶음요리의 파기름 건두부

내가 작년까지 근무했던 음성군 금왕읍에는 동북볶음요리라는 음식점이 있다. 중국인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곳이다. 나랑 남편은 이 가게의 찐단골이었다. 우리는 횟수를 다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자주 이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매번 한국인은 우리뿐이었다. 다른 손님들은 전부 중국인이었다. 가게를 가득 채운 커다란 중국어와 호탕한 웃음소리에 마치 중국에 여행 온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서 우리가 주문하는 메뉴는 거의 늘 같았다. ‘파기름 건두부’, ‘지삼선’, ‘새우볶음밥그리고 설원’. 간혹 배가 많이 고프지 않을 때는 (그런 때는 별로 없긴 했지만) 새우볶음밥을 생략하기도 했고, 때로 남편이 고기가 당길 때는 (그런 때는 꽤 있었다) 새우볶음밥 대신 꿔바로우를 시키기도 했다. 그렇지만 파기름 건두부와 지삼선은 빼놓지 않고 늘 먹었다.

그중, 가지와 감자와 피망을 볶아 만든 지삼선은 여느 양고깃집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메뉴이지만, 파기름 건두부는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로는 이 집에서밖에 먹어 본 적 없는 독특하고 맛깔난 메뉴다. 다른 음식점에서도 건두부를 볶은 요리는 먹어 봤지만 이동북볶음요리에서만큼 식감과 풍미가 훌륭한 경우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국수처럼 가늘게 채썬 건두부, 역시 가늘게 썰어 볶은 대파, 간장 베이스인 듯한 소스, 잘게 다진 생마늘, 그리고 고수, , 고수의 조화. 담백하면서도 향긋하고 고소하고 또 매콤한 맛에 나는 너무나 행복해지곤 했다.

중국요리를 먹으면서 알콜을 섭취하지 않는 사람은 맛알못이거나 독한 금욕주의자둘 중 하나일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맛을 아는 쾌락주의자이므로, 이 풍미 있는 음식에 적절한 술을 곁들인다. 내 최애는 이과두주이지만, 동북볶음요리 가게에서는 아쉽게도 이과두주를 팔지 않아, 매번 설원을 마셨다. 만족도는 높았다. 도수는 이과두주보다 낮지만, 향긋하고 깔끔하고 좋은 술이다.

 

3. ‘짬뽕이과두주

뭐 먹고 싶어?”라고 누군가 물을 때면 네가 먹고 싶은 거.”라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기원한다. 네가 먹고 싶은 게 짬뽕이기를. 혹은 짜장면이기를. 그러면 내가 짬뽕을 먹을 수 있으니까.

나는 짬뽕을 좋아한다. 짬뽕을 좋아하지만 그 맛에 대해 뚜렷한 취향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짬뽕이면 다 좋다. 얼큰하고 뜨끈한 국물에 풍성한 해물, 쫄깃한 면발. 그리고 곁들여 마시는 이과두주.

비 내리는 날의 짬뽕은 언제나 옳다. 이과두주를 곁들인 짬뽕은 더더욱 옳다. 배고팠다 먹는 짬뽕에 이과두주라면 천상의 경험이다. 진한 짬뽕 국물에 125ml짜리 이과두주 한 병은 마주한 이와 약 한 시간 정도의 허물없는 대화이고, 짱짱했던 긴장의 대담한 이완이자, 신선한 창작 욕구와 영감(靈感)의 샘이다.

이과두주는 코로 향을 들이마시면서 천천히 혀를 적시듯이 마신다. 원샷하지 않는다. 입을 살짝 축이는 느낌으로 살며시 마신다. 이렇게 하면 그 풍미를 여유롭게 만끽할 수 있고, 엉망으로 취해 민폐를 끼치는 일도 방지할 수 있다.

독자여, 혹시 내게 밥을 사 주고 싶다면 중화요릿집으로 날 초대해 달라. 값비싼 요리는 필요치 않다. 짬뽕과 이과두주면 내게 최고다. 우리, 비 오는 날에 만나자.

그림 _ 박현경 , ‘ 천사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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