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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현경이랑 세상읽기

다시 만난 세계

by 인권연대 숨 2025. 4. 25.
다시 만난 세계
박현경(화가, 교사)

 

토요일 아침, 잠에서 깨어 뜨거운 커피 한 잔 들고 2층 작업실로 간다.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 30센티미터의 수채화용지가 작업대에 펼쳐져 있다. 한 달 넘게 진행 중인 작업. 천사의 붉고 커다란 날개 한쪽이 반쯤 채색돼 있다. 얼기설기 쌓인 액자들 틈바구니에서 잠을 자던 고양이 봉순이가 깨어 야옹댄다. 핸드폰에 블루투스 오디오를 연결하고 음악을 켠다. 빌리어코스티의 소란했던 시절에가 작업실 안에 잔잔히 깔리고 나는 크레용을 집어 천사의 날개 채색을 이어 간다.

 

그렇게 아침 7시 반부터 10시 반까지 세 시간이 훌쩍 흘러, 운동하러 갔던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둘이서 맥도날드에 간다. 나는 슈슈버거 세트, 남편은 빅맥 세트. 천천히 먹고 마시며 일주일간 밀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통유리창을 통해 비치는 햇살이 따사롭다.

 

집에 돌아오면 바로 작업실로. 다시 음악을 켜고 작업을 이어 간다. 가늘고 짧은 크레용 선을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겹쳐 그어 질감을 살려서 채색하는 작업.

 

작업을 하며 듣는 플레이리스트에는 이랑의 우리의 방’, 빌리어코스티의 소란했던 시절에’, 정승환의 눈사람’, 악뮤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서영주의 우주 IN’, 너드커넥션이 부른 날개’, 너드커넥션의 우린 노래가 될까’, 신지훈의 우리의 얘기를 쓰겠소’, 신지훈의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등이 들어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그때 그 노래’, ‘아무도 필요 없다’, ‘마냥 걷는다도 듣는다.

 

반복되는 작업으로 슬슬 졸음이 올 땐 음악 대신 유튜브 매불쇼웃다가를 켠다. 소리만 들으며 작업을 이어간다. 웃기는 대목에선 눈물이 나오도록 웃어 대며 그림을 그린다. 그렇게 실컷 웃다가 다시 음악으로 돌아간다.

 

오전 열한 시 반에 작업을 재개해서 오후 네 시 반 정도가 되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빗줄기가 들이치지 않을 정도로만 창문을 연다. 빗소리가 작업실 안으로 성큼 들어선다. 어느덧 작업도 많이 진행돼 있다. 천사의 오른쪽 날개를 온전히 다 칠하고 몸통을 지나 이제 왼쪽 날개를 채색하고 있다.

 

비 내리는 토요일, 달달한 음악 속 작업하는 행복. 이 즐거움의 온도를 살짝 더 올려 주기에는 적정량의 음주, 흡연이 제격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적정량’. 몇 주 전 편의점에서 사 둔 발렌타인 위스키 한 샷 스트레이트. 말보로 골드 한 대. 그렇게 조금 이완된 눈으로 보면 아까까지는 안 보였던 손 볼 곳이 보이기도 하고, 이어 나갈 작업에 대해 아이디어가 생기기도 한다.

 

남편이 가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 720분쯤. 나는 그제야 하루의 작업을 마무리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남편이 만들어 준 저녁을 함께 먹고, 설거지는 내가 한다. 이제 넷플릭스 보다가 자는 일만 남았다. 그렇게 토요일이 뿌듯하게 간다.

 

이런 토요일 일과는 그야말로 다시 만난 세계’.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한 작년 123일 이후 나는 평일 저녁과 토요일을 잃었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평일 저녁을 잃고, 토요일을 잃었다. 집회를 준비하고 참가하는 데 쓴 그 시간들은 굉장히 소중하고 값졌으며,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44일 윤석열 파면 선고의 기쁨도 있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몹시 그리웠다, 나의 소중하고 안온한 토요일이.

 

우리 모두에게는 아늑한 보금자리 같은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라도 일상의 전부를 전쟁터 혹은 광장에서만 보낼 수는 없다. 아니, 정말로 꼭 이뤄야 할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일상의 전부를 전쟁터나 광장에서 소진하지 않고 보금자리에서 쉬고 즐기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더 오래, 더 잘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보금자리, 평화로운 토요일을 마음껏 누리며 쉰다. 싸워야 할 싸움들이 내게 줄지어 다가오고, 세상엔 여전히 비통한 일이 많지만, 오늘은 푹 파묻혀 쉬기로 한다. 다시 만난 세계, 나의 토요일을 꼭 끌어안고서.

천사의 오른쪽 날개를 온전히 다 칠하고 몸통을 지나 이제 왼쪽 날개를 채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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