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식지/현경이랑 세상읽기

다시 걷기

by 인권연대 숨 2025. 5. 26.
다시 걷기
박현경(화가, 교사)

 

다시 걷기.

참 오랜만이다.

버스를 타고 다니던 출근길을 걸어서 다니기로 결심한 것이 일주일 전. 바로 실행에 옮겨 매일 아침 걷고 있다. 수동 우리 집에서 수곡동 사무실까지 걸어서 약 한 시간 이십 분.

버스를 탔을 때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걸으니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봄 하늘이 무척 아름답구나. 저 카오스 무늬 길고양이는 이 근처에서 날마다 보이네? 이 골목은 담장의 장미 넝쿨이 참 예뻐. 이 사람은 어제도 뛰더니 오늘도 뛰는군. 차량을 타고 빠르게 이동할 때는 볼 수 없었던 세세한 것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다.

육거리시장을 지날 때면 놀랍기 그지없다. 이 시간에 벌써 장을 다 보고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언젠가 내가 아침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온다고 해도 이른 아침에 시장에 와서 장을 볼 것 같지는 않기에, 이른 아침 시장 앞 버스 정류장 풍경은 놀라울 따름이다.

 

꽃다리를 지나면 중학생인 것 같은 남녀 학생들 한 무리를 마주치곤 한다. 때론 깔깔대고, 때론 시무룩해져 있고, 때론 무표정인 그들을 보며 절실히 느끼는 건 생기. 저들 대부분은 자신이 얼마나 생기 넘치는지 그게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건지 미처 알지 못하리라 짐작해 본다. 내 자신 역시 저 나이 때 그러했기에. 이런 저런 열등감과 싸우느라 자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미처 알지 못하는 친구에게는 천사가 꿈속에 찾아가 꼭 알려 주기 바란다.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지나면 초등학교 앞을 지난다. 제 몸집에 비해 커다란 가방을 메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들. 어떤 아이는 신호등을 기다리며 핸드폰으로 유튜브인지 뭔지 동영상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어린이들에게도 다 자기 관심사가 있고 자기 세계가 있다. 그걸 무시하는 어른들을 어린 시절의 나는 무척 짜증스러워했다. 나의 인생 목표 중에 죽을 때까지 꼰대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 중 하나가 아마 이것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 특히 나보다 어린 사람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

 

사무실 바로 옆에는 중학교가 있다. 이 학교 담장 옆을 지날 때마다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하루는 점심식사 후 사무실에서 문득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이 학교 담장 안 건물 2층 창문에서 난간으로 한 남학생이 훌쩍 뛰어나오더니 너무도 자연스럽고 홀가분한 태도로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다. 이른바 식후땡일 것이었다. 내가 속으로 어라?’ 하는 사이 그 친구는 흡연을 마치고 창문 안으로 들어갔다가 어느새 다시 훌쩍 뛰어나와 두 번째 개비를 태우기 시작했다. 재밌는 친구였다.

이때 나는 진심으로 고민이 되었다. ‘저 학생이 흡연을, 그것도 교내에서 흡연을 한다는 것을 저 학교 선생님께 알려 지도를 받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런데 저 학생은 지금 너무나 달콤하게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데 저 소중한 자유를 지켜 줘야 하지 않을까?’ 솔직히 나의 속마음은 후자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담배를 피웠다고 혼나고 지도를 받는 것보다 자신만의 자유를 만끽하며 정서적 만족감을 누리는 게 저 학생의 인생에 더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후에 나의 이런 고민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게 무슨 개소리야?’ 하는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날 그 학생에 대해서는 사무실 식구들 대다수의 의견에 따라 그 학교에 근무하시는 선생님께 말씀드리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그 선생님께서는 2층 창문에서 이어지는 그 난간이 높이가 꽤 되어 안전사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그 창문을 폐쇄하도록 조치하셨다고 한다. 더는 그곳에서 담배 피우는 학생을 볼 수 없지만 지금도 이 학교를 지나칠 때면 그때 그 자유로운 영혼이 떠올라 웃음이 나곤 한다.

 

그렇게 혼자 웃으며 사무실 문을 따고 들어가 컴퓨터를 켜고 컵에 물을 채워 자리에 앉는다. 수첩을 펴고 오늘 할 일을 확인하고 업무를 시작한다. 아직 정식 근무 시간이 시작되지 않았기에 나 혼자다. 곧 사무실 식구들이 도착하고 화기애애한 기운으로 공간이 가득해진다.

걷고, 달리고, 자전거 타고, 요가하고……. 일과 속에 운동이 촘촘히 들어차 있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 우울이 나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모두 그만두게 되었다. 출근길 한 시간 이십 분 거리를 걷는 것도 운동이라고 칠 수 있다면, 운동이란 것을 때려치운 지 약 삼 년 만에 다시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떠올린 단어가 있다. ‘회복’. 걷는 것은 회복을 불러오는 행위다. 오늘도 회복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박현경, 천사 27

 

'소식지 > 현경이랑 세상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만난 세계  (2) 2025.04.25
삼월소회(三月所懷)  (3) 2025.03.25
나는 끝까지 나를  (1) 2025.02.25
왜 너희의 사랑은  (0) 2025.01.27
아무 노력 말아요  (1) 2024.12.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