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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현경이랑 세상읽기

나는 끝까지 나를

by 인권연대 숨 2025. 2. 25.
나는 끝까지 나를
박현경 (화가, 교사)

 

이삿짐을 싼다는 건 힘든 일이다. 물건 하나하나를 집을 때마다 거기 깃든 추억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일요일인 오늘, 관사 퇴거 작업을 했다. 202371일부터 현재까지 약 18개월 동안 월, , , , 금요일을 지낸 방이다. 먹고 자고 고민하고 그림 그리던 이 공간에서 나의 흔적을 지워 내는 건 시간도 힘도 많이 드는 일이었다. 여행 온 것처럼 단출히 지내리라 마음먹었었는데 그동안 쌓인 책이며 옷이 왜 이리 많은지…….

 

책을 한 권 들어 올릴 때마다 그 책을 사던 날의 기분, 그 책을 읽다가 했던 전화 통화 따위가 자꾸만 떠올랐다. 옷을 한 벌 집어 들 때마다 그 옷을 입고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그때 내가 그 사람을 사랑했는지 미워했는지 하는 기억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때 내가 잘한 걸까? 아니면 잘못한 걸까? 그 사람한테 그렇게 한 게 옳은 일이었을까? 아닐까? 내가 잘 살아온 걸까? 아닐까?’ 이렇게 나의 이삿짐 싸기는 이 방에서 지낸 지난 18개월 동안의 삶에 대한 되새김질이 되었다. 나에게 던지는 이 끝없는 물음들에 대한 답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면 마음이 쓸쓸해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이 방에 사는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조용히 묻혀 살려 하던 삶에서 벗어나 전교조 활동가가 되었고, 음성지회장으로 활동한 임기 1년 동안 머리가 깨지도록 고민하고 울었으며, 사무처장 후보로 출마할 것을 결심하며 다시 기운을 냈고, 당선되어 임기 초를 이 방에서 지냈다. 학교 일과 조합 일로 바쁜 가운데 새벽이면 꼬박꼬박 일어나 그림 작업을 했고, 그렇게 한 작업들로 한국과 프랑스에서 총 일곱 번의 전시를 치렀다.

 

이렇게 압축해 이야기했지만 이 18개월을 이루는 수많은 하루마다 새벽에 눈을 떠 커피를 끓여 작업물 앞에 앉는 순간이 있었고, 녹초가 되어 퇴근해 만두를 데워 먹는 순간이 있었고, 일기장에 재빨리 적어 내려간 어떤 말들이 있었고, 누군가와 반갑게 통화를 하는 순간이 있었고, 어둠 속에서 TV로 보던 영화 장면들이 있었고, 밤사이 머리와 가슴을 휩쓰는 꿈이 있었고…….

 

그 구체적인 순간들을 살아 내며 끊임없이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모여서 오늘이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묻게 되는 것이다.

내가 제대로 된 선택을 하며 살아왔을까? 아니면 잘못 가고 있는 걸까?’

 

책장과 옷장, 서랍장에 있던 물건들을 모조리 정리해 짐을 꾸리고, 주방 식기들도 신문지로 싸서 상자에 넣고, 조리대와 가스레인지와 싱크대를 깨끗이 닦았다. 그리고 욕실 바닥을 솔로 박박 문질렀다. 20년 된 관사이니 새것처럼 만들기는 어렵겠지만, 새로 입주하는 선생님이 최대한 기분 좋게 생활을 시작했으면 싶었다.

 

꾸물꾸물 물건들을 챙겨 넣는 동안 밀려오는 추억과 스스로에게 던지는 온갖 질문들로 어지러웠던 마음은, 박박 문지르고 닦고 또 박박 문지르는 다소 거친 육체노동을 거치며 차분하고 명징해져 갔다.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만큼 욕실 청소를 마치고 나자 상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 지난 시간을 더듬으며 나 자신에게 던진 물음들에 대한 오늘의 답은 이것이다.

 

내가 잘했나 잘못했나는 중요하지 않다. 내 잘잘못을 따지고 비판하는 사람은 이미 많고도 많다.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여기느냐가 중요하다. 세상에 나 한 사람만이라도 나 자신을 잘잘못 따지지 말고 안아 주어야 한다. 대개 타인에게 의리를 지키고 타인을 위로해 주는 것을 좋은 일이라 생각하고, 실제로 그건 좋은 일이 맞다. 그런데 과연 나 자신에게는 의리를 지키고 있는지, 나 자신을 위로해 주고는 있는지 수시로 체크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렇게 일기장에 적는다. 오늘 이삿짐 싸기의 결론이다.

 

다른 사람은 나를 위로할 수 없다. 그러니 내가 나 자신을 위로해야 한다.

모두가 나를 탓한다 해도 나는 끝까지 나 자신의 편이 되어 줄 것이다.

모두가 내게 실망한다 해도 나는 결코 나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나에 대해 신뢰를 잃는다 해도 나는 끝까지 나 자신을 신뢰할 것이다.

나는 결코 나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림_박현경, 천사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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