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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현경이랑 세상읽기

왜 너희의 사랑은

by 인권연대 숨 2025. 1. 27.
왜 너희의 사랑은
박현경(교사, 화가)

 

현경쌤 안녕하세요! 저는 ○○○입니다. 현경쌤, 지금까지 국어 선생님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국어가 진짜 재미있었고 학교생활에 도움도 많이 되었습니다. 저는 현경쌤이 제일 좋아요!

저번에 제가 가정사 때문에 힘들 때 이야기도 들어 주시고, 제가 말을 잘 안 듣고 장난을 많이 쳐도 이해해 주시고, 제 말을 잘 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모든 수업도 끝났고 내년에 현경쌤도 못 보지만 제 기억 속에 계속 영원히 생각하겠습니다. 현경쌤 지금까지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현경쌤! 24년 한 해 동안 말 안 듣는 7반 수업하시느라 너무너무 수고하셨어요. 저희도 현경쌤을 국어 선생님으로서, 부담임 선생님으로서 만나서 너무 재밌고 행복했어요. 이젠 무극중을 떠나셔서 전보다 자주는 못 볼 거라는 생각에 너무너무 슬프지만 현경쌤은 항상 저희 마음 곁에 머무르신다고 생각할게요.

힘들 때 언제나 저희가 멀리서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 잊지 마세요! 언제나 현경쌤을 응원합니다!

 

1월 10일 금요일에 학생들이 겨울방학을 맞이하면서 나는 학생들과 이별을 했다. 이제부터 2년 동안 나는 학교가 아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충북지부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됐으니 이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할 기회는 다시 없을 것이다. 이날 많은 학생들이 내가 일하는 한국어학급으로 찾아와 내게 손편지를 주고 과자도 주고 포옹도 해 줬다.

“고마워! 고마워! 잘 읽을게. 정말 고마워!”

이렇게 편지들을 받아 가방 속에 소중히 넣고, 서둘러 학교를 빠져나와 회의를 하러 갔다. 그러고 나서 폭풍 같은 일주일이 이어져, 성명서 발표하고 취재 요청하고 기자회견문 쓰고 도교육청에 항의 전화하고 조합원 선생님들 의견 수렴하고 회의하고 공문 보내고 집회 준비하고 집회 때 발언하고 하며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런 뒤 맞이한 일요일. 오늘도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지만 그래도 일요일이라 다른 날보다는 마음에 여유가 있었나 보다. 가방 정리를 하다가 ‘아, 맞다!’ 하고 편지들을 꺼내어 하나씩 읽었다.

이 삐뚤빼뚤하고 서툰 글씨들은 왜 나를 울리는가. 왜 너희의 사랑은 이토록 순한가. 순한데 또 왜 이렇게 나를 울리는가.

취재 요청서 써야 하는데, 규탄 성명서 써야 하는데, 항의 방문 면담 자료 만들어야 하는데, 냉철하고 단단해야 하는데, 왜 너희의 사랑은 나를 이토록 한없이 말랑말랑하게 만드는가.

 

나는 늘 때려치우고 싶었다. 매년 이번 해까지만 하고 때려치워야지, 라고 생각하며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 매여 있지만 않으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더 마음껏 날개를 펼칠 수 있는데, 이 복작복작하고 답답한 세계에 갇혀 있다는 게 억울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 깨닫는다. 내가 그토록 때려치우고 싶어 하고 미워한 바로 그 학교라는 공간에서 실은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이 학생들에게서 그리고 또 동료 교사들에게서 넘치는 사랑을 받고 또 받아 왔다는 것을, 현장을 떠나게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나를 이토록 사랑해 준 이 학교 현장을 조금 더 살아갈 만한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이다.

나를 사랑해 준 아이들아, 늦었지만 깨달았으니 너희의 사랑을 잊지 않겠다. 투쟁이 힘에 부칠 때 너희의 사랑을 기억하겠다. 아니 언제나 너희의 사랑을 기억하겠다.

왜 너희의 사랑은 자꾸 나를 울리는가. 왜 너희의 사랑은 이토록 순한가. 왜 너희의 사랑은 순하고도 이토록 힘이 센가.

박현경, 천사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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