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순이 발톱
박현경(화가, 교사)
왕순이 발톱. 최근 우리 부부의 이슈였다. 고양이 왕순이는 올해 열세 살이다. 젊었을 때는 스크래처를 신나게 박박 긁어 대며 스스로 발톱 관리를 하더니, 나이를 먹어서인지 요즘은 활동량이 적어지면서 스크래처를 잘 안 긁어 발톱이 꽤 자랐다. 하필이면 내향성 발톱이라 발바닥 살을 파고들어 왕순이가 아파했다. 그래서 몇 달 전엔 고양이 미용 하는 곳에 데려가 발톱을 깎아 달라고 했는데, 발톱 깎기를 마치신 미용사분은 왕순이 성질이 보통이 아니라며 이리 저리 빨갛게 할퀴인 팔뚝을 보여 주셨다. 미용사분께 죄송했고, 또 평소엔 순둥이인 왕순이가 이런 공격성을 보였을 정도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전쟁 같은 발톱 정리를 마치고 어느새 시간이 흘러 왕순이 발톱이 또 길어져 버렸다. 왕순이가 스트레스를 덜 받게 하려면 집에서 깎아 주는 게 나을 거 같다며 남편은 유튜브로 고양이 발톱 깎는 영상을 열심히 찾아보고 연구했다. 왕순이가 자기 발이 사람 손에 잡혀 있는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평소에 왕순이 발을 자꾸 만지는 연습도 하고, 발톱 가위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 주기 위해 발톱 가위를 왕순이 발에 대었다 뗐다 하면서 놀아 주기도 했다. 하루에 발톱 딱 두 개씩만 자르고 바로 추르를 주기로 하고, 거사를 치를 일시까지 정했다.
마침내 왕순이 발톱 두 개를 깎기로 한 일시, 그러니까 지난 목요일 저녁이 되었고,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왕순이에게 다가갔다. 나는 왕순이 몸을 붙든 채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남편은 왕순이 왼쪽 발을 잡고 발톱 가위를 가까이 가져갔다. 왕순이는 처음엔 짜증을 부리다가 나중엔 격노해 몸부림치며 고함을 질러 대다 남편 손을 물었다. 남편은 물려 가면서 가까스로 발톱 한 개를 잘랐다. 그리고 말했다. “더는 못하겠어요.” 우리는 하루에 발톱 두 개는 무리다, 하루에 한 개씩만 자르자고 계획을 수정하며, 노하신 왕순님께 추르를 먹여 드렸다.
다음 날 저녁엔 어제의 경험이 있으니 오늘은 상황이 좀 나으리라는 희망을 품어 보았다. 그리고 어제보다 더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왕순이 앞에 꿇어앉았다. 나는 왕순이 몸을 붙든 채 머리를 쓰다듬고 남편은 왕순이 오른쪽 발을 잡았다. 발톱 가위를 발톱에 거의 가져다 댔을 무렵, 왕순이의 분노가 이미 어떤 한계를 넘고 있음이 몸부림과 호령 소리에서 느껴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남편은 발톱 가위를 벌리려다가 마침내 손을 떨궜다. “못하겠어요.”
결국 우리는 왕순이 발톱을 전문가 손에 맡기기로 했다. 지난 번 그 미용사분은 왕순이를 힘들어하셨으니, 다른 곳에 가 보기로 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일요일이 됐다.
오늘 우리가 찾아간 곳의 미용사분은 나이가 지긋한 남성이었다.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그 미용사분을 편의상 ‘할아버지’라 부르기로 한다. 연륜의 아우라를 알아본 걸까. 왕순이는 할아버지 앞에서 더없이 차분해졌다. 어떤 주저함도 없이 할아버지의 부드러운 손길을 따라 작업대 위에 얌전히 자리잡았다. 할아버지는 나와는 달리 왕순이 몸을 꼭 붙들지 않았는데 왕순이는 움직이지 않고 편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가 발톱 깎으시는 속도는 놀라웠다. 딱, 딱, 딱, 딱, 발톱이 잘려 나가고 또 다른 발의 발톱이 딱, 딱, 딱, 딱, 잘려 나가는 동안 할아버지는 왕순이 머리를 살살살 쓰다듬어 주셨고, 왕순이는 평온하다 못해 눈을 감고 하품까지 했다. 발톱 손질 비용은 1만5천 원. 남편과 나는 할아버지께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드렸다. 그렇게 우리의 고민은 시원하게 해결됐다. 다음번에도 여기로 오면 된다.
남편과 나의 고민이 왕순이 발톱 딱 한 가지뿐이었던 건 절대 아니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남편도 나도 숱한 고민 속을 허우적대며 산다. 왕순이 발톱 이슈가 해결되었다 해도 내 삶은 해결해야 할 일투성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왕순이 발톱 사건은 대단히 기념비적이다. 왜냐하면 이 일 덕분에, 최근 어두컴컴했던 내 안에 환한 엘이디(LED) 전구 하나가 탁 켜졌기 때문이다. 아, 해결되는구나. 너무나도 부드럽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해결되는구나.
오늘은 시간이 많이 흘러도 기억날 하루다. 일요일, 늦잠을 잤고, 남편은 운동을 갔다가 점심을 먹고 들어온다고 했고, 나는 혼자서 천천히 볶음밥을 만들어 먹었고, 남편이 집에 왔고, 며칠간 묵직하게 마음을 누르던 왕순이 발톱 문제를 해결하러 함께 나섰는데, 가을이었고, 하늘이 파랬고, 바람결이 부드러웠고, 바람결만큼이나 부드럽게 할아버지가 왕순이 발톱을 깎았고, 왕순이는 발톱을 깎이고도 기분이 좋았고,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 중 한 가지가 그렇게 해결됐고, 어쩐지 다른 일들도 잘될 수 있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고... 그렇게 한 가닥 희망을 되찾은 하루. 오늘이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아마도, 시간이 가르쳐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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