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 이야기
박현경(화가, 교사)
격렬한 섹스 후에 그 남자가 말했다.
“나랑 살아 줘서 고마워요.”
나는 대답했다.
“고맙긴요. 이건 당신이 밑지는 일이에요.”
“아니에요. 나랑 살아 줘서 고마워요.”
“아니, 이건 백 퍼센트 당신이 밑지는 일이라니까요.”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자, 나는 고지(告知)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내가 하자(瑕疵) 많은 인간이란 걸 당신한테 분명히 밝혔습니다. 나중에 속았다며 원망 말아요.’
2015년 어느 날이었다.
2025년 현재, 나는 여전히 그 남자와 살고 있다. 그에게 지난 10년은 그때 내가 했던 말이 빈말이 아닌 온전한 사실적시(事實摘示)였음을 숱한 체험을 통해 깨닫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 ‘숱한 체험’의 가벼운 예를 들면 이렇다. 내가 발을 굴러 가며 그에게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부린 일들 중 그가 정말로 뭔가를 조금이라도 잘못했던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전부 단지 내가 배가 고팠거나 혹은 생리 전날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나에 대해 사랑만 가득한 그를 나는 그렇게 마음 아프게 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이런 게 있다. 나는 수도 없이 여러 번, 친구들이나 동지들, 지인들과 술을 퍼마시다가 그에게 전화해서 나를 데리러 와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경계를 넘어 꽤 먼 곳에서도 그랬다. 이를테면 서울. 그가 퇴근 후 청주에서 서울까지 차를 운전해 나를 데리러 와 꽐라가 된 나를 태우고 다시 운전해 청주까지 내려온 일이 몇 번 있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나를 위해 주는 남편이 있다는 게 몹시 자랑스러웠다. 그렇지만 그가 얼마나 피곤할지는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우울증이 심해져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하루 열여덟 시간씩 잠을 자던 기간이 있다. 나는 휴직 중이었고, 무기력이 심해져 청소고 뭐고 평소 루틴처럼 하던 일들을 전부 다 때려치운 상태였으니 당연히 집안 꼴은 엉망이었다. 당시 그는 편도 한 시간이 훌쩍 넘는 거리를 운전해 출퇴근하고 있었다. 그때도 나는 내가 힘든 것만 생각했지 그의 하루가 얼마나 고될지, 그의 마음은 어떨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밖에도 나는 사고를 여러 건 쳤다. 그 중에는 너무 중대해서 여기에 차마 적을 수 없는 일도 있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났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동안 그가 나에게 잘못한 일은 단 한 가지도 찾을 수가 없다. 나는 그에게 눈꼽만큼도 섭섭한 일이 없다. 어마어마한 불균형이다. 그는 어마어마하게 밑졌다. 지금도 그는 밑지고 있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요즘 같은 계절이면 내 맘속에 반복 재생되는 장면이 있다. 늦은 저녁, 현관문이 열리고, 바깥 찬 공기를 온몸에 머금은 채 그가 집으로 들어온다. 이제부터 나하고 같이 쉴 시간이 너무 기대된다는 듯 두 눈엔 신나는 기색이 가득하다. 그의 뺨과 입술은 차고 통통하다. 거기에 내 따뜻한 뺨과 입술을 비빈다. 뭔가 묵직한 걱정거리에 골똘했던 내게 그의 명랑함이 뺨을 통해 전해진다. 어린 소년 같은 그의 싱싱함에 나는 내 불안과 우울을 잊는다. 그렇게 수많은 저녁을 함께하며 어느새 십 년이 흘렀다.
그동안 내가 너무 그의 속을 썩여서, 소년처럼 싱싱하던 그가 예전보다 어두워진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앞으로 함께할 저녁들을 통해 그에게 그 싱싱한 웃음을 되돌려주고 싶다.
지난 11월 18일은 우리의 열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수년 전부터 ‘우리 십 주년 때는 오마카세 가자’며 별러 왔지만 정작 이날이 다가와서는 우리의 지갑도 시간도 여의치 않았다. 그날 나는 퇴근해서도 계속 아이패드와 두꺼운 책자를 펴 놓고 일을 해야 했고, 그는 퇴근 후 친구들과 테니스 약속이 있어서 밤 아홉 시 반이 넘어 들어왔다. 내가 먹고 싶다고 한 ‘중간 맛 신전떡볶이’랑 김치참치김밥, 그리고 모듬튀김과 함께였다. 우린 마주앉아 천천히 음미하며 맵고 기름진 만찬을 즐겼고, 오늘 각자 겪은 일들을 공유했다.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비록 내가 그동안 사고도 많이 치고 그의 속도 많이 썩였지만, 한 번도 변치 않았고 앞으로도 변치 않을 사실이 있다. 나는 그의 뺨을 어루만지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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