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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현경이랑 세상읽기

먹구름

by 인권연대 숨 2026. 1. 26.
먹구름
박현경(화가, 교사)

 

어린왕자는 생각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꽃을 가졌으니 난 부자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평범한 장미 한 송이를 가졌을 뿐이야. 그거랑 내 무릎 높이인 화산 세 개, 그 중 하나는 어쩌면 영원히 꺼져 버렸는지도 모르지. 이걸로는 훌륭한 왕자가 될 수 없어.’

그리고 그는 풀숲에 누워 울었다.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필자 번역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초등학생 시절부터 최근까지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었고, 그때마다 특히 마음에 남는 장면들이 있었다. 요즘 자주 떠오르는 장면은 바로 위에 인용한 부분이다.

저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저때 당시 어린왕자는 배가 고팠거나, 생리 직전이었거나(?), 목이 마른 상태였거나, 잠이 부족한 상태였을 거라고. 그러니 바꿔 말하면, 저 장면의 어린왕자가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얼큰한 짬뽕 한 사발 개운하게 때리고, 디저트로 진한 초콜릿케이크까지 먹고, 그런 다음 한나절 죽은 듯이 푹 자고 일어나면, 생각이 확 바뀌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어린왕자의 저 마음은 어쩌면 우울증 증상일 수도 있다. 특히 저런 마음 상태가 꽤 여러 날 지속된다면 의학의 도움을 받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내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하자면, 어린왕자가 지금까지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약물 치료를 받아 본 경험이 전혀 없을 경우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에 가서 의사 선생님께 증상을 말씀드리면 (증상을 말씀드리면서 울게 될 수도 있어, 어린왕자야.) 아마도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에 해당하는 약물을 하루에 아주 조금씩 복용하도록 처방해 주실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적은 용량의 약을 며칠간 꾸준히 먹는 것만으로도 어린왕자의 멘탈은 놀라울 정도로 회복될 가능성이 상당하다. (어디까지나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께서 이 글을 읽으신다면 혹시 부정확한 내용, 외람된 내용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고, 댓글로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도 가끔 생각한다.

나는 내 그림들에 애정을 갖고 있지만, 그것들은 어쩌면 남들이 보기에 그저 쓰레기일지 몰라. 나는 재능이 없는 것 같아. 내가 과연 좋은 화가로 남을 수 있을까. 게다가 나는 남편한테는 말썽쟁이 골칫덩어리고 사회생활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 나는 형편없는 인간이야.’

그리고 베개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린다.

예전에는 이런 생각이 쏟아져 내릴 때마다 바닥도 없이 가라앉고 또 가라앉는 마음을 어찌할 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다. 이른바 메타인지가 작동하게 된 것이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열패감과 우울감, 울고 싶은 마음이 내 안에서 폭죽처럼 펑펑 터지기 시작할 때, 나는 묻는다. ‘올 것이 오는 건가? 생리가 가까워졌나? 내가 배가 고픈가? 목이 마른가? 잠이 부족한가? 오늘 약은 챙겨 먹었나?’ 그렇게 스스로 묻고 점검하는 동안 나는 이제 안다. ‘이 먹구름도 결국 지나간다는 것을. 이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내 성장의 증거다.

 

요즈음 유난히 먹구름이 하늘을 자주 가린다. 그때마다 나는 그게 곧 지나간다는 걸 확실히 안다. 그렇기에 어린왕자처럼 풀숲에 누워 울거나, 예전의 나처럼 베개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는 대신, 눈물은 찔끔 정도만 흘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이 먹구름이 결국 지나간다는 것을 잊지 않을 수 있게 된 것만 봐도 나는 성장한 거야.’ 그리고 먹고 싶은 걸 충분히 먹는다. 생리 전날이라면 달콤한 디저트도 먹는다. 물을 충분히 마신다. 약을 챙겨 먹는다. 잠을 잔다. 푹 잔다. 세상만사를 다 제쳐 놓고 자고 또 잔다. 내가 자는 동안에도 텔레그램이며 카톡에는 나를 찾는 메시지들, 내가 읽어야 할 메시지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지겠지. 조금씩 조금씩 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나는 그 메시지들을 보내는 세상 사람들에게 마음속으로 외친다. ‘안녕, 여러분. 오늘은 내가 지구에 없다고 생각해 주세요. 나는 이제 없습니다.’ 그렇게 까무룩 잠이 든다.

잠에서 깼을 때 나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다. 먹구름은 더 이상 없다. 나는 내가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좋다. 누군가 나를 형편없는 화가,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해도 나는 가볍게 ()웃어 주고는 내 그림 작업을 이어 가고 또 내가 할 일을 할 것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몇 년 전에 비해 확실히 성장했다는 걸 알겠다. 오늘의 먹구름은 이 글쓰기로 쓸어버렸다. 그렇다. 나는 내가 좋다.

박현경,<천사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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