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떡볶이 효과
박현경(화가, 교사)
0.
많고도 많은 일을 겪어 왔지만 올해를 대표하는 장면은 이거다.
1.
종일 불안과 분노와 짜증에 시달리며, 언제라도 치솟을 듯한 그 감정들을 가까스로 누르며, 장학사랑 통화하고 교장이랑 통화하고 기자랑 통화하며 이 일 저 일을 처리하던 내가, 드디어 퇴근을 한다. 비는 오는데 우산이 없다. 그냥 비를 맞으며 버스 정류장까지 걷는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서 내린다. 아까보다 조금 더 굵어진 빗방울을 맞으며 수암골 언덕을 걸어 올라간다. 마침내 집에 도착. 번호키로 문을 따고 들어서자마자 고양이 왕순이, 봉순이가 와다다다 내게로 달려온다. “잘 있었어? 언니 오늘 힘들어. 배고파? 언니 보고 싶었어?” 말을 걸며 밥그릇에 사료를 채워 준다. 젖어 버린 외출복을 벗고 목 늘어난 티셔츠와 산 지 이십 년쯤 된 추리닝 바지를 입는다. 보일러 온도를 올리고 눕는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왕순이랑 봉순이도 내 옆에 와 눕는다.
2.
시간이 조금 흐르고 들리는 번호키 소리. 남편의 귀가. 남편은 뭔가 기대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검정 비닐봉다리를 들고 있다. 마트에 들렀다 오는 모양. 이후 무언가를 씻고 썰고 굽는 소리....... 매콤하면서도 달큰한 냄새가 퍼져 온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식탁에 앉는다. 남편이 프라이팬째로 식탁에 내려놓은 그 음식은 바로 기름떡볶이다.
3.
설탕 세 큰술, 간장 세 큰술, 고춧가루 세 큰술, 식용유 두 큰술, 참기름 두 큰술, 대파 썬 것 듬뿍, 미원 약간을 섞어 소스를 만든다. 여기서 대파는 많이 들어갈수록 좋다. 소스에 떡볶이용 떡을 버무려 프라이팬에 지진다. 약한 불에 천천히 익힌다. 떡이 다 익은 후 설탕을 뿌린다. 이렇게 하면 구워진 고춧가루와 대파가 설탕으로 코팅되면서 맛이 더 좋아진다. 그게 핵심이다. 이것이 남편의 레시피다.
4.
프라이팬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남편과 나는 떡을 하나씩 집어 먹으며 감탄한다. “우와!” “맛있다!” “괜찮죠?” “이거 팔아도 되겠어요.” 등등. 감탄에 이어서는 그날 하루 내 정신을 피로하게 했던 이른바 ‘짜증나는 일들’에 대해 털어놓는다. 짜증나는 일들을 얘기할 때 중요한 건 짜증내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이러저러하게 반응해서 답답했어요.’ ‘일이 이러저러한 방향으로 흘러가니까 짜증이 나더라고요.’ 이렇게 최대한 덤덤하게 얘기하는 게 필요한 거 같다. 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상대방에게 전염시키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조곤조곤 얘기하다 보니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진다. 아마 이 매콤달큰바삭한 기름떡볶이의 맛과 식감에 이미 마음이 누그러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은 이야기를 듣고 내 편을 들어 준다. 어쩌면 내 기분을 좋게 하려고 내 편을 들어 주는 걸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 남편 역시 뜨끈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 마음이 너그러워져 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아무튼 대화는 순조롭게 흘러가고, 나는 하루 동안 언짢았던 감정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걸 경험한다. 세상이 한층 낙관적으로 보이고 인생이 꽤 괜찮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일컬어 ‘기름떡볶이 효과’라고 한다. 혹시 다른 음식을 먹고서 이런 인식의 변화를 겪었다고 해도 모두 통틀어 ‘기름떡볶이 효과’라고 부르기로 한다.
5.
많고도 많은 일을 겪어 왔지만 올해를 대표하는 장면은 이거다.
밖에서 에너지를 다 쓰고 집에 와, 오붓하게 누리는 ‘기름떡볶이 효과’.
남편에게 고맙다.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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