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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위에서부는바람15

연말결산 연말결산잔디 올해 늦여름, 문득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쓴 커피가 혀에 닿고 목구멍을 지나 식도를 거쳐 위장에 도착했을 때쯤, 몸에서 기억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 이 맛은 스무 살의 봄에 처음 맛본 자판기 블랙커피 맛과 닮았다. 물론 향은 에스프레소 쪽이 짙고 목 넘김도 훨씬 감미로웠으나 스무 살의 그해 봄, 아직 겨울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그때, 커피 맛을 잘 모르면서도 햇살 들어오는 동아리방에 혼자 앉아서도, 엄마랑 여섯 시간 떨어진 거리에서 처음 살게 되어 느끼는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도, 낯선 또래들과의 자유로운 대화에서도 백 원짜리 커피가 주던 잔잔한 위로는, 아직 커피보다 삶이 더 쓰다는 걸 알지 못했던 그때의 나를 지금 여기로 불러온다. 물론 쓴맛과 함께 어우러진 신맛과 약간.. 2024. 12. 26.
춤                                                                                                  잔디 올해는 어쩔 수 없이 전에 다니던 성당에 두 번 다녀왔다. 두 번의 장례미사. 한 번의 악수, 한 번의 포옹. 한 번의 봉투와 한 장의 손수건. 한 번의 오열, 한 번의 흔한 눈물. 어떤 죽음은 나에게 깊은 슬픔으로 다가와 가슴이 미어져서 미사가 끝난 후 유가족을 버얼건 눈으로 마주하기가 힘들었고, 어떤 죽음은 나에게 지치고 오랜 고통과의 이별로 다가와 자유로움으로 이어져, 그저 담담히 성당 뒤켠에 서서 눈으로 검은 옷을 입은 유가족의 등을 쓰다듬을 수 있었다. 어떤 죽음은 더 이상 그를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다는 사실이 너.. 2024. 11. 25.
줄을 친다는 것 줄을 친다는 것 잔디 작렬하던 매미 소리는 다 어디로 사라져 갔을까? 뜨거운 햇살과 함께 사라져 매미 소리가 툭 끊겼다. 연이틀 내린 비로 갑자기 성큼 큰 걸음으로 방충망을 뚫고 가을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바람이야 어떻게 어떻게 통과할 수 있다지만 가을은 어떻게 이 안으로 발자국을 옮긴 것인지. 신비롭기까지 하다.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방바닥을 따뜻하게 데웠다. 난방 온도를 실내 온도보다 높게 설정! 내가 만약 이 공간에서 홀연히 여행을 떠난다면 챙기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제일 처음에도 제일 나중에도 떠오른 것은 ‘책’. 살면서 우연히 아가야를 쳐다볼 기회가 올 때 심장이 먼저 뛰었지만, 꽃 그려진 접시보다 은은한 빛깔의 머그잔보다 빨간 스웨터보다 아기자기한 스티커보다 처음 물에 둥둥 떠.. 2024.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