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이야기
최근 스쿨미투로 불구속 기소된 충주여고 교사 2인에게 법원이 각각 벌금 300만원과 취업제한 1년을 선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충주여고를 졸업한지 27년이 되었다. 사실 그때는 몰랐다. 일부 선생님들에 발언이나 손짓이 성희롱이나 성추행에 해당할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2018년 미투 열풍은 학교도 비켜가지 않았다. 충북여중 학생들이 용기 있게 나선 스쿨미투는 전국적으로도 주목받았다. 학생들의 고발로 수많은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성폭력과 성차별적 발언을 일상적으로 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학생들이 어렵게 고발한 가해교사들의 잘못에 사회는 너무나 관대했다. 충북여중 가해교사들은 2심에서는 오히려 감형을 받았다. 재판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해당 가해교사들은 피해 학생들에게 2차 가해도 저질렀다. 교육청도 수수방관, 미온적 태도를 일삼으며 피해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았다.
#피해자를 지워라?
지난 5월 충북청주경실련에서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들은 조직 차원에서 해결해줄 것을 기대하고 내내 기다렸는데 돌아온 것은 사과와 재발방지 대책이 아니라 2차 가해였다. 결국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를 구성했는데 구성하자마자 행한 것은 활동가들에 대한 직무정지와 사무실 폐쇄였다. 그러고도 시간을 흘려보냈다. 급기야 피해자지지 모임이 꾸려졌고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 입장도 밝혔다.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지워지고 성희롱 사건은 조직 갈등으로 왜곡됐다. 그런 가운데 피해자들에 대한 2차 가해는 계속 됐다. 가해자들이 경실련 사건을 팩트체크한다는 명분으로 소셜미디어에 모임방을 개설했다는 기막힌 소식도 들렸다.
그제 오후 충북청주경실련 시민센터 외벽에 “경실련은 성희롱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라”는 피해자 지지모임에 요구 내용이 담긴 포스트잇들이 나붙었다. 이튿날 출근길에 보니 항의 포스트잇은 제거됐다. 비상대책위원회 (이하 비대위) 관계자들이 떼버렸다고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비대위가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게 대체 무엇인지 의심만 커져간다.
#당연한 것은 없다
스쿨미투 판결과 경실련 사태를 지켜보면서 계속 <보이지 않는 여자들> 책 이야기를 생각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여성운동가인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의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젠더데이터 공백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수천년 동안 일종의 무념처럼 당연하듯 여겨온 사실을 이야기한다. 바로 이 세상은 남성을 디폴트(기본값)로 설계됐다는 것. 여자는 데이터에서도 잊어도 되는 존재, 무시해도 되는 존재, 없어도 되는 존재로 만들어져 투명인간 취급했다고 말한다.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걸 이를테면 제설정책에서부터 사무실 실내 온도, 자동차의 안전 설계 등 모든 것들이 다 남성 디폴트로 설계되었음을 세세하게 일러준다.
모든 데이터에서 여성이 지워졌으니 여성들이 편할 리가 있을까! 그 불편함이 당연한 것일 줄 알았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책을 읽고 나서는 더 이상 당연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고 되새겼다. 낮은 성인지 감수성, 젠더 의식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이 세상은 이제 변화가 필요하다.
#남은 이야기
사건 발생 이후부터 지금까지 참 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목소리도 많았지만 시민단체를 폄하하는 이들도 참 많았다. 언론들도 앞 다퉈 시민단체에서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다며 확인도 없이 선정적인 보도들을 쏟아냈고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다고 보도했다.
모든 일들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마음이 착잡했다. 비교적 진보적인 조직 문화를 가졌다고 볼 수 있는 시민단체 조직 내에도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문화가 만연하고 그런 현실이 오늘에 이런 사태까지 낳은 것이라 생각하니 답답하다. (우리는 왜 우리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말해오지 않았던가!) 나는 뒤늦게 사건을 알았다. 그동안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하던 활동가들이 왜 그렇게 말라가고 힘들어 했는지…. 내가 곁을 주지 못했구나 싶어서 선배로서 동료로서 미안하기도 하고 후회도 들었다. 그리고 마주한 시민단체의 위기에 고민이 깊어간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