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이야기는 픽션일 수 있으며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허구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이야기는 바로 당신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상황 1] 교장과 교감의 지시가 불합리할 뿐 아니라 황당하기까지 하다는 데에는 다들 이견이 없어 보였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시험지 양식을 뜯어고쳐 문항 배치, 엔터 치는 자리, 스페이스 바 치는 자리 등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모조리 통일하라는 거였다. 평가 업무 담당 부장 교사인 K가 보기에 이는, 과목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무지한 처사인 동시에, 교사의 전문성과 자율성에 대한 침해이기도 했다. 더욱이 교사들이 문제를 출제할 때 이런 자잘한 형식 규칙에 정신을 빼앗길수록 정작 중요한 내용 면에서 실수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K는 지난 십오 년 정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교사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관리자들의 주관적 기준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K는 이 문제에 대해 교장, 교감과 긴 시간 면담을 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교직원 회의 시간에 공론화해야겠다고 K는 생각했다.
한편, 교장, 교감이 자리를 비운 교무실에선 교장, 교감의 지나친 요구에 대해 교사들이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중 S의 목소리가 가장 높았다. S는 학교에서 경력이 제일 많았고 주요 업무를 담당한 부장 교사이기도 했다. K가 보기에 뒷전에서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넘어서 교장, 교감과 직접 대면해 반대 의견을 피력할 만한 사람은 이 학교에서 K 자신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구성원의 대부분이 저경력 또는 기간제 교사다 보니 관리자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걸 어려워했다. 하지만 S라면 연배도 교장, 교감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고, 평소 동료들과의 대화 자리에서 꾸준히 교장, 교감을 비판해 왔으며, 무엇보다도 학교 운영에 대한 의견을 적극 제시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주요 부장을 맡고 있었다. 동료 교사들과 함께 한창 교장, 교감의 비합리적 처사를 성토하고 있는 S에게 K가 말했다. “맞아요, 부장님. 이 문제 이대로 두면 정말 안 될 거 같아요. 그래서 제가 회의 시간에 이 얘기 적극적으로 하려고요. 부장님께서 맞장구만 좀 쳐 주세요. 그럼 훨씬 나을 거 같아요.” 순간 S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S는 방금 전까지 소리 높여 하던 이야기를 뚝 멈추고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K에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날 오후 교직원 회의 시간에도 S는 내내 같은 모습이었다.
[상황 2] 부장 회의 시간이었다. 회의실에 교장, 교감, 행정실장, 그리고 다섯 명의 부장 교사가 둘러앉아 있었다. 교장은 ‘우리 학교의 모든 교육 활동을 정상화시키겠다.’라는 취지로 내년도 계획들을 나열했다. 이른바 그 ‘정상화 계획’에는 부장 교사 K의 업무에 관련된 것들도 포함돼 있었는데 사실상 ‘정상화 계획’이라기보다는, ‘그간 혁신적이고 창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일들을 관행적 방식으로 되돌리려는 계획’이었다. 이와 더불어 평가에 관한 내용이 K의 마음에 걸렸다. 도교육청 성적관리지침에서도 요구하지 않는 사항들을 교장 나름의 기준에 따라 모든 선생님들이 지키도록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는데, K가 보기에 이는 각 교과 교사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침범하는 일이었고, 업무 담당 부장으로서 이를 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K는 발언을 시작했고 이는 곧 삼십여 분에 걸친 교장과의 일대일 토론으로 이어졌다. “도교육청 지침을 넘어서는 사항을 선생님들께 권장 정도는 할 수 있어도 강요는 할 수 없습니다.” “강요를 왜 못 해? 교장이 강요할 수 있는 거야!” 이런 설전이 계속되는 내내 교장과 K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구십 도 각도로 꺾고 책상만 바라보고 있었다. 교장과 K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긴 설전은 “저는 동의할 수 없는 일에 동의한다고는 절대 말 못 하는 사람입니다. 앞으로도 저는 계속 의견 제시할 겁니다.”라는 K의 말과, ‘피곤하다. 이제 그만 하자.’는 듯한 교장의 끄덕임으로 마무리됐다.
부장 회의에서 책상만 응시하고 있던 이들 중 한 명인 부장 교사 H가 그날 오후 K에게 농담처럼 말을 건네 왔다. “K 선생, 점심은 먹었어? 아까 교장 선생님한테 그렇게 혼나더니…….” “혼났다고요? 부장님은 제가 혼났다고 생각하세요?” K는 아까 교장의 무논리에 맞서 논쟁을 하던 그때보다 이때 훨씬 더 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불쾌감과 함께 지독한 무력감이 몰려왔다. 어서 이곳을 떠나고 싶어졌다.
그림_박현경,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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