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더듬어 길 위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과 길을 걸으며 내 눈과 마음에 아로새겨졌던 수많은 아련한 감동의 순간들을 다시금 소환한다.
객기를 부린 나의 오만이 망가진 발로 인해 산산이 부서질 때쯤 만난 알베르게 주인장 할머니는 내가 순례자라는 이유만으로 고귀한 존재임을 가슴으로 깨닫게 해주었다. 그때의 따뜻함이 지금도 아련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일본인 할아버지 순례자는 혼자셨는데 우리가 한국인이라고 하니 할 말이 많으신 듯 했다.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잘못된 역사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며 당신이라도 대신 사과하고 싶다는 말을 잘 보이지 않고 느린 손놀림에도 번역기를 돌려가며 그예 사과를 하셨다. 늙은 어르신이 마음을 다해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면서 순례 길의 일정도 순조로웠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중간에 먹을 간식을 챙기고 목표한 만큼 걷고 나면 숙소를 정하고 씻고 동네 산책을 나갔다. 물론 먹을 것을 사기 위해서 산책을 나서기도 했다. 스페인은 어느 곳을 막론하고 오후2시에서 5시까지 씨에스타(오침시간)를 갖는다. 상점들도 모두 문을 닫고 오가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그 시간을 다행히 피하면 일찍 요기를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기다려야 한다. 한국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 빨래를 하고 나면 다음날을 위해 쑤시는 다리며 팔에 파스를 바르고 발을 치료하고 하루여정을 수첩에 기록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거의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똑같은 일상이어서 지루한 것이 아니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뚫고 들어오는 온갖 것들에서 벗어나 난생처음으로 간결하고 단순하고 가벼워진 나로 지내는 특별함을 선사하는 시간이었다. 50일 동안 일상으로부터 일탈이 얼마나 내게 고귀한 시간이었는지 다녀와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깨닫는 중이다.
산티아고 길에 유난히 한국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혼자 온 청년이거나 정년퇴직을 한 중년의 남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임용고시에 실패하고 마음을 추스려 다시 도전할 준비를 하러왔다는 청년도 있었고, 고등학교 내내 공부만 했고 나쁘진 않았지만 성적에 맞춰 대학을 선택해서 만족할 수 있다는 기대와 생각으로 대학생활을 했는데 ‘이 길이 과연 나에게 올바른 선택지였는가?’라는 물음이 가시지 않고 확신도 서지 않아 휴학을 하고 혼자 생각할 시간을 벌어보고자 왔다는 대학생 언니(?)도 있었고, 커다란 포부로 제주도를 벗어나 뭍으로 대학을 왔는데 졸업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살고 있는 자신의 처지의 답답함에 시시때때로 집을 떠나온다는 제주도 아가씨도 있었고 퇴직 후에 부인에게 휴가를 준다며 허세를 부리지만 정작 본인을 위해 매년 한 달씩 산티아고 길에 온다는 부르주아 할아버지도 계셨고 생애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이기도 하고 가성비가 가장 좋아서 선택한 여행이라며 일하는 부인이 매일같이 귀국하라는 성화에도 불구하고 머물고 있다는 살림하는 중년의 아저씨도 있었고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느라 열심히 뒷바라지한 자신에게 보상 차원으로 긴 휴가를 왔다는 울산아줌마도 있었고 마음이 아픈 동생과 좋은 추억을 만들고자 했던 것인지 아니면 험한 세상을 동생에게 미리 경험해주고 싶었던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동생을 살뜰하게 챙겨가며 고단한 길을 동행하는 형도 있었고 군대에 다녀온 아들이 복학하기 전에 이러저러한 아빠의 경험을 알려주고 싶어서 노쇠한 몸을 이끌고 힘든 여정에 도전한 아버지도 있었고......
내가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내 모습인 듯 중첩되는 나날이었다. 각자 어떤 목적으로 길을 떠났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마주한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을 위해 기나긴 인생에서 잠시 쉬어가는 법을 아는 이들은 아니었을까. 누구라도 한번쯤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용기를 내어보길 바란다. 멈춤으로 인해 얻는 것은 감히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것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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