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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호> 다만 궁금해할 뿐_박현경(교사)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19. 10. 24.

 

손 가는 대로 펼쳐 본 25년 전의 일기장에는 이런 문장들이 적혀 있다.

 

벌써 8일 동안이나 일기를 못 썼다.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여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너무 불안해지기도 한다. 내가 그동안 너무 유치해진 것 같기만 하다. ! 정말 한동안 좀 바빠 봤으면…….’ 할 정도로 한가로워지고 싶다. 나의 마음도 아주 깨끗이 정리하고 싶다.”

 

내가 진짜일기를 쓰게 된 지 1년쯤 됐을 무렵의 글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마음이 지금의 마음과 다르지 않아 신기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받은 선물 중 가장 뜻깊은 것을 고르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열 살 때 엄마가 주신 일기장을 고르겠다. 초등학교 3학년, 더 이상 엄마, 아빠 말씀이나 선생님 말씀대로가 아닌 나의 생각이 왕성히 발육하던 그 무렵,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께 매일 검사를 맡아야 하는 대외용일기와 별개로 네가 진짜 하고 싶은 얘기를 적어 보라며, 엄마는 두툼한 노란색 양장 노트 한 권을 선물해 주셨다. 학교생활이나 선생님들에 대해 한창 불만이 많던 시기, 속마음을 거리낌 없이 적을 수 있는 그 일기장은 내 영혼이 자유로이 뛰어놀며 생각과 감정의 근육을 키우는 운동장이었다. 나는 그 운동장을 사랑했고, 그 안에서 뛰어놀면 뛰어놀수록 점점 더 넓어지는 그 신기한 운동장에 드러누워 때때로 우주를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렇다. 감히 말할 수 있다. 그 평범한 아이의 내면엔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광활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고. 겉으로 드러난 그 아이의 모습이나 선생님이 읽은 대외용 일기는 존재의 표피 중에서도 극히 협소한 일부일 뿐이었다고.

 

어린 시절부터 비밀의 운동장을 누비며 하늘을 올려다본 기억을 일기장이라는 구체적인 기록물로 간직하고 있어 좋은 점이 있다면 그건, 다른 사람들도 누구나 남이 알지 못하는 자기만의 세계를 지니고 있음을 잊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상대방을 웬만큼 파악하고 있다고 믿을 때가 바로, 그 사람에 대한 존중을 놓치게 되는 시점일 것이다. 이는 너 같은 경우를 전에 겪어 봐서 알고,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도 아는데……라는 전제로부터 뻗어 나가는 꼰대스럽고 지루한 조언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특히 자신보다 어리거나 미숙(할 듯)한 존재를 대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교사로서 가장 부끄럽고 슬퍼질 때는, 내가 바로 그 함정에 빠졌음을 뒤늦게 깨달을 때다. 이 친구의 안에 어떤 생각과 감정이 꿈틀대고 있는지 어떤 경이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는지 내가 도무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잊고서, 내 나름대로 분석하고 진단을 내려 바르지만 뻔한말을 하고 났을 때다. 어찌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뿐이겠는가. 그 누구와의 관계에서든, 날마다 보는 익숙한 관계일수록 더더욱, 내가 상대방에 대해 실제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기억할 때에만 존중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고 관계의 신선함도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쉬는 시간에 우리 반 학생의 지구과학 교과서를 우연히 펼쳐 봤다가 흥미로운 내용을 읽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 우주에서 별, 행성, 성간 물질 등 보통 물질이 차지하는 비율은 4.6퍼센트에 불과하고, 우주의 95퍼센트 정도가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사람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정체를 알지 못하는 신비롭고 드넓은 한 우주를 마주하게 되는 것. 그러니 어찌 감히, 내가 당신을 안다 할 수 있을까, 당신을 가르치려 들 수 있을까. 이른 아침, 하루 동안 마주할 그 여러 우주들을 떠올리며 삼가 중얼거린다.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도무지 알 수 없어, 다만 궁금해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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