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남편과 함께 살기로 마음먹었을 때 한 가지 걱정이 된 건 고양이였다. 이 사람과 같이 산다는 건 그와 수년째 함께 지내 온 고양이 ‘왕순이’랑도 한 식구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 털북숭이 생명체는 아마도 나의 고요를 흐트러뜨릴 거야. 매일 아침 짧게라도 명상하는 시간이 내겐 반드시 필요한데, 차분히 그림 그리고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한데, 남편은 이런 나를 잘 이해하고 배려해 주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고양이는? 고양이가 부산스럽게 굴어서 더 이상 명상도, 그림도, 책 읽기도, 글쓰기도 제대로 못하게 되면 어쩌지? 내 소중한 고요를 침해당할까 봐 두려웠다. 왕순이랑 함께 지낸 지 4년 반이 넘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정말이지 공연한 걱정이었다. 내 옆이나 무릎 위에 앉아 갸르릉갸르릉거리는 왕순이의 존재는 고요를 깨뜨리기는커녕 오히려 한없이 그윽하고 평화롭게 해 준다. 또한 나는 ‘인생은 알록달록’, ‘왕순이랑 나랑’ 연작들을 비롯해 이 친구가 없었더라면 결코 그리지 못했을 그림들을 그리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울고 있는 내게 다가와 눈물을 핥아 주는 그 혀에서 느껴지는 건, 언어와 종(種)을 넘어서는 뜨거운 우정, 가슴을 훅 파고드는 무조건적 위로……. 마주보고 눈을 깜박이며 하루하루를 함께하는 동안, 우린 서로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을 자국을 남긴다. 왕순이뿐이 아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어떤 사건이든 지레 걱정하며 경계했던 존재가 의외로 힘이 되곤 했던 일들을 나는 가만히 떠올려 본다.
‘눈을 뜨면 어김없이 가슴을 덮쳐 오는 / 검정 보자기가 두려웠습니다.’(졸시 「검정 보자기 그늘」 부분)
떨치려 애쓰지만 떨쳐지지 않는, 벗어났나 싶으면 또 끈질기게 들러붙는, 나의 오랜 검정 보자기, 바로 불안. ‘일이 말도 안 되게 꼬여 버릴 수도 있어.’, ‘내가 이미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도 몰라.’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한 온갖 기발한 생각들이 호흡처럼 끊임없이 일어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들. 아주 어린 꼬마 때부터 불안은 늘 나를 따라다녔다. 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프로 교사가 되진 못했는지, 수능 시험이 다가오고 우리 반 학생들의 대입 수시모집 결과가 나오기 시작하자 불안은 또 나를 휘어잡고 뒤흔들어 댔다. 퇴근을 하고도 간담이 서늘하면서 떨리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림을 그렸다. 선을 긋고 지우개질을 하고 색칠을 하는 동안 불안은 서서히 잦아들었고, 하루를 마칠 즈음엔 마치 따뜻한 목욕물 속에 잠겨 있는 듯한 평온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에 걸쳐 그림을 완성하며 생각해 보니, 나는 거의 항상 이래 왔지 싶다. 그림이 담고 있는 주제와 별개로, 매번 스케치를 하고 채색을 하는 과정 대부분이 고질병 불안을 견뎌 내기 위한 몸짓 아니었던가? 불안하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다 보니 삶이 참 살아갈 만하다는 느낌과 함께 든든한 에너지를 얻는다. 이쯤 되면 ‘불안은 나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혹시 누군가에게 아주 조그만 힘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 두려운 검정 보자기, 시꺼먼 불안이 실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돌이켜 보니 그랬다. 나를 방해할 것 같아 보였던 존재가 실제로는 내 삶을 풍요롭고 따뜻하게 해 주는 한없이 귀한 벗이 되었다. 원수처럼 나를 쫓아오며 맹공격하는 불안이 실은 내가 줄기차게 그림을 그리고 삶을 더욱 사랑하는 원동력이었다. 소심하고 겁 많은 채로 또 하루를 건너느라 오늘도 참 많이 헤맸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속삭여 준다. 훗날 돌이켜 보면, 이 하루도 결코 쓸모없지 않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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