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리 분터골
1950년 7월 초 경찰과 국군은 충북 청주 청원지역 보도연맹원 700여명과 청주형무소 재소자 300여명 등 천여 명의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집단학살한 후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 일대에 암매장하였다. 2007년 7월 진실화해위원회는 사건발생 57년 만에 공식적인 유해 발굴 사업을 실시하였는데 당시 분터골 일대에서 70여구의 희생자 유해와 수십 점의 탄피, 의류 등 다수의 유품이 수습되었다.
첫 번째로 방문한 고은리 분터골은 한국전쟁 당시 충북지역 최대 천여 명이 학살된 민간인학살지의 현장이다. 여기 현장 표지판에는 400명 정도가 학살당했다고 표시되어 있지만 당시 누구도 정확한 인원을 세지 않았기 때문이 이 수치도 추정치일 뿐이다.
지금 이 학살터 바로 맞은편 마을이 남일면 고은3리다. 지금은 이곳에 숲이 우거져있지만 6.25전쟁 당시에는 이곳에 풀과 나무가 없었다. 당시만 해도 나무로 때서 사용했기 때문에 나무 뿐 아니라 우리 발밑에 있는 잔가지들까지 모두 다 마을사람들이 가져갔다. 그래서 저 앞에 마을에서 이곳이 다 보였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트럭이 하루에 7대씩 1주일을 왔다고 한다. 트럭 한 대에 20명 정도가 탑승할 수 있으니 대략 추정을 해보니까 천 명 정도 된다. 처음에는 형무소 재소자들을 학살하고 그 다음에는 보도연맹 원들을 끌고와서 죽였다.
수많은 인원을 학살하고 매장해야 하다 보니 당시 여러 명을 매장한 후 얇게 흙만 덮고 그 위에 다시 매장, 그 위에 다시 매장 그렇게 여러 겹을 매장했다. 발굴과정에서도 확인된 점인데 당시 희생자 유가족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민간인 학살 직후 분터골로 시신을 수습하러 갔지만 다른 이들의 수많은 시신을 파헤쳐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훼손이 발생했기 때문에 대부분 모르는 이들일 지라도 자신의 가족을 찾기 위해 시신을 훼손하면서까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긴 공백기가 있었기에 산짐승들의 먹잇감이 되기 좋았고 여기저기 유해가 흩어졌다. 그 외에도 믿기 힘들겠지만 과거에는 몸에 좋다는 이유로 인간의 뼈가 귀한 재료로 한약재상에 팔려나가기도 했다. 실제 분터골에 한약재상에서 방문하여 유해를 수습해간 모습을 봤다는 증인도 있다.
지난 2016년 추모공원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교육의 장으로 조성하는 추모공원 사업이 있었다. 청주 분터골과 대전 산내면은 유력한 지역이었다. 추모공원은 지금 대전 산내면에 지어지는 중이다. 추모공원이 분터골에 지어지든 산내면에 지어지든 지어지는 것이 중요하지만 당시 총4개의 지자체와 6개의 지역에서 응모를 했는데 충청북도는 응모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큰 안타까움이 있다.
보시다시피 이 장소에는 <청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지> 라는 표시판이 있습니다. 이 허허벌판에 이 표시판이라도 있으니 우리가 이곳을 찾아와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사실 누군가 설명해주는 이 없이 이 표지판만 보고 일반 시민들이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쉽게 이해하기 어려움이 있습니다. 몇 억을 들여 화려한 공원, 공간을 건축하자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뜻으로라도 이 공간에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이해, 분터골 학살에 대한 이야기 등 방문하는 시민들이 안내자 없이도 이곳에 오면 쉽게 보고 이해하고 돌아갈 수 있는 기념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낭성면 도장골
1950년 7월 초 청주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 및 보도연맹원 등 100여명 이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집단학살 돼 묻혀있는 곳이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곳을 우선발굴대상지로 선정해 당시 청원군수와 함께 '유해매장지 표지판'을 세웠다. 표지판에는 ‘위 장소는 1950년 한국전쟁 시기에 발생한 청주형무소 사건의 민간인 집단 희생지이므로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지난 2019년 3월 청주시와 충청북도는 사방댐을 건설하겠다며 유가족과 어떤 상의도 없이 유해터와 봉분을 훼손했다.
<참고기사>
https://www.cb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7941
시행청인 충북산림환경연구소는 유해발굴지와 사방댐 건설현장이 거리가 있어 유해매장지 훼손과 무관하다고 했지만
유해가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되어 있는 매장지는 산림벌채를 명분으로 파헤쳐저 있었으며 유가족들이 현장에 만들어논 봉분도 이미 훼손된 후 였다.
유가족들은 충북도지사와 청주시장에게 진정어린 사과와 공사중지 및 유해발굴 수습을 요청하였으나 공사 중지 및 유해발굴 수습을 무시한 채 공사를 진행하여 완료하였고 유해를 수습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시원한 밀면 한그릇으로 일정을 마무리하며 박만순대표님과 마지막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리가 잘못 기억하는 역사가 있다. 지금도 무심코 사용하는 용어 중 하나인 "양민학살"이다.
이 표현을 잘 들여다보면 굉장히 반인권적이고 폭력적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양민, 선량한 백성이라는 뜻이다. 당시 사상과 무관한 이들이 보도연맹원이 되기도 했고, 실제 수감된 사회주의자들, 남로당 당원들도 학살의 대상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정치범, 사상수, 양심수로 감옥을 간 사람들이다.
당시의 법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더라고 그 사람들은 대부분 2, 3년 정도의 실형을 받은 이들이었다.
2,3년 실형을 살고 가족들의 곁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잘 살아가면 되는 사람들이었다.
학살이 집중되어 있던 6.25전쟁을 기점으로 보면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많으면 1년 보통 6개월의 형량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이들은 이 형량을 채우고 잘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양민학살 피해자라고 말하는 이들 중에도 '빨갱이었는데 우리랑은 다르지' 말하는 분들이 계시다.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사상이 있었건 없었건 중요한 것은 비무장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국가라는 엄청난 권력이
집단 인권유린을 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양민학살'이 아니라 '민간인학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한다. 는 것을 꼭 기억하고 계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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