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박현경(화가)
1. 타인의 몸
매주 한 번씩 누드 크로키 모임에 참여해 그림을 그린다. 1분 또는 3분마다 바뀌는 포즈에 따라, 한눈팔 겨를 없이 모델을 관찰하고 선을 그으며 몰입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면서 느끼고 또 느끼는 것. 아름답구나. 있는 그대로 참 아름답구나. 마른 몸은 마른 대로, 살찐 몸은 살찐 대로, 배 나왔으면 배 나온 대로, 안 나왔으면 안 나온 대로, 흉터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여자든 남자든 어떤 성별이든……. 아름답지 않은 몸은 어디에도 없구나. 흔한 레토릭으로 주워섬기는 말이 아니라, 경험을 토대로 진심을 다해 증언하건대, 아름답구나. 있는 그대로 참 아름답구나. 이렇게 느끼며 끄덕이다 보면 생각은 자연스레 ‘나의 몸’으로 향한다.
2. 나의 몸
고백하건대 ‘날씬한 몸’에 대한 집착과 동경은 언제나 내 두뇌를 채우고 있었다. 살찐 몸에 대한 열등감이 극심했던 고등학교 때부터, 살 빠진 몸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 이십 대와 삼십 대 내내. 심지어, ‘날씬함을 미의 기준으로 내세우는 사회ㆍ문화적 현상이 여성들을 옥죄고 있으나 여러분은 이에 휘둘리지 말고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내가 가르치던 여고생들 앞에서 열변을 토하던 때에도, 정작 나 자신은 몸무게와 칼로리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내가 몸무게 걱정도 칼로리 계산도 집어치우게 만든 강적을 만났으니 이는 바로 우울증이다. 우울증이 가장 심했던 기간인 올해 5~6월에는 평소에 하던 산책이나 운동도 다 집어치우고 거의 집안에서만 지냈으며, 집안에서도 가만히 누워 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었다. 그 여파였을까? 몸매가 달라지고, 전에는 잘 맞던 옷들 중 더 이상 맞지 않아 못 입는 옷들이 부쩍 늘어났다.
몇 주 전 몸무게를 재어 보니 일 년 전 몸무게에서 10kg 정도가 늘어나 있었다. 바로 이십 년 전 내 고등학교 때 몸무게로 돌아간 것이다. ‘나는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열등감에 시달리던 고등학교 때. ‘결국 돌고 돌아 이 몸무게야?’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했다. 살이 쪘다는 사실을 제법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점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지금은 지난 5~6월과 달리 매일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한다. 하지만 이건 몸무게에 대한 조바심 때문이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다. 나는 이제, ‘지금 이 상태 그대로’ 괜찮다는 걸 알고 있다.
3. 벗은 몸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전신 거울 앞에 선다. 누드 크로키를 할 때 모델을 관찰하듯 내 몸을 관찰한다. 그러면서 느끼고 또 느끼는 것. 아름답구나. 있는 그대로 참 아름답구나. 마른 몸은 마른 대로, 살찐 몸은 살찐 대로, 배 나왔으면 배 나온 대로, 안 나왔으면 안 나온 대로, 흉터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여자든 남자든 어떤 성별이든……. 아름답지 않은 몸은 어디에도 없구나. 있는 그대로 참 아름답구나. 내 몸도 그러하구나.
이십 년 전의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다면 말해 주고 싶다. 너는 참 아름답다고. 너의 몸은 참 아름답다고.
4. 우리의 몸
참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몸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간혹 현재의 자기 몸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몸무게나 체질량 지수 등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 여기고, 따라서 이 조건을 지켜 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 또한 나의 몸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마치 누가 우리의 눈과 판단력에 마법을 걸기라도 한 듯이 제가끔 자기 나름의 열등감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몸이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이대로의 내 몸을 사랑한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몸을 사랑하니 타인들도 더 귀하게 여겨진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걸 한층 더 진하게 느낀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만나면 말해 주고 싶다. 당신은 참 아름답다고. 당신의 몸은 참 아름답다고.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어 이 글을 썼다.
그림_박현경, 「슬픔」
10.29 참사 희생자를 추모합니다.
'소식지 > 현경이랑 세상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9호> 나는 왜 여기에 (0) | 2023.01.30 |
---|---|
<128호> 감았던 눈을 와짝 뜰 때 (0) | 2022.12.26 |
<126호>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0) | 2022.10.27 |
<125호> 어정쩡한 시간 속에 (0) | 2022.09.26 |
<124호> 그르노블을 생각하면 _ 글쓴이: 박현경(화가) (0) | 2022.08.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