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여기에
박현경(화가)
내 그림들에 둘러싸여 이 글을 쓴다. 프랑스 파리 15구의 한 갤러리. 흰 벽에는 알록달록한 괴물들이 붙어 있고 벌거벗은 내 자신이 나를 내려다본다. 사람 얼굴이 달린 물고기가 아가미에서 꽃을 뿜고, 소년과 호랑이가 물고기를 타고 날아다닌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통유리문 안을 들여다보고, 가끔씩 들어와 그림들을 자세히 본다. 내게 질문하고,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일 년 전부터 계획해 준비한, 내가 원하던 공간과 시간. 감사하다.
겁이 많은 나는 전시회를 앞두고 불안했다. 작품들을 포장해 위탁 수하물로 비행기에 싣고서 열네 시간 반을 날아와, 네 박스나 되는 그 짐을 파리 공항에서 되찾은 후 갤러리까지 운반하고, 전시 오프닝 전날 내 의도대로 작품들을 설치하고, 전시 시작 날엔 오프닝을 치러 내고, 이어 전시를 진행하고 또 그 다음 전시로 넘어가는 그 모든 과정, 그 속에서 생길 수 있을지도 모르고 절대로 안 생길지도 모를 온갖 불상사들의 리스트가 내 머릿속에 자동으로 생성됐다. 그리고 나는 그 리스트를 하나씩 체크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여행을 준비했다. 당시 내 일기장엔 이런 문장들이 적혀 있다.
‘나는 두려워. 나는 두려워.’와 ‘두려워하지 마. 두려워하지 마.’는 사실 같은 말일 것이다. 나는 이 두 말, 실은 같은 뜻인 두 말을 수시로 중얼거린다. 그러면서도 알고 또 믿는다. 다 잘될 거라는 것을.’
“두렵다. 두렵다. 두렵다.”
요즘 자꾸만 중얼대게 되는 말. 저절로 중얼대게 된다. 마치 주문처럼 이 말을 중얼대고 나면 불안이 조금 가라앉는다. 그저께까지로 프랑스에 가져갈 작품은 모두 완성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이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감수해 가며 정신적, 육체적 수고를 무릅쓰고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전시 오프닝 때에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오셨다. 다들 그림을 하나하나 찬찬히 관찰하고 내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질문에 답하다 보니 깊은 대화까지 나누게 됐다. 내 안에서 튀어나온 기괴하고 아름다운 괴물들의 존재를 그들이 직관적으로 느끼고 받아들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프랑스 관람객분들의 감상과 질문의 결이 한국의 관람객분들과 닮은 듯하면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어 흥미로웠다. 이국인들의 시선에 비친 내 작품들을 바라보며 나 자신도 새롭게 발견하는 것들이 있었다. 이 새로운 발견들은 앞으로의 창작에 새로운 활력이 될 것이다.
아침에 숙소를 나서면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많고,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나라에도 아침이 있고 출근길이 있고 자전거 타는 사람들,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곳과 한국의 사람들 모습이 비슷한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라 그 차이점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이 나라 사람 중 누군가가 한국에 간다면 역시 한국만의 그리고 한국인들만의 크고 작은 특징들을 발견하며 재미있어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살던 곳 청주를 떠올리면 그곳의 거리거리가 신선하게 기억된다.
어제는 연금 개혁안에 반대하는 총파업으로 대부분의 지하철 운행이 중지됐다. 그래서 나는 숙소에서 갤러리까지 두 시간을 걸어 출근하고, 저녁에도 두 시간을 걸어 퇴근했다. 아침에는 차를 끌고 나오거나 자전거를 타고 나온 사람이 평소보다 확 많아져 도로가 몹시 혼잡했다. 저녁에는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다가 길가 카페에 앉아 칵테일로 목을 축였다. 걷는 건 언제나 하는 일이지만 새로운 이유로 새로운 광경을 보며 오래오래 걷는다는 것은 참 신선한 일이었다. 앞으로 청주에 돌아가서도 길을 걸을 때면 어제의 긴 행군을 떠올리게 될 듯하다. 그렇게 해서 익숙한 길들에 새 의미 하나가 더해지는 것이다.
어쩌면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나는 여기에 왔을 것이다. 익숙한 삶, 익숙한 장소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나의 작품들을 보고, 나의 일상을 보려고. 그리하여 창작에도 일상에도 새 활력을 얻으려고. 일상성에서 벗어나 멀리멀리 날고 싶다고 먼 나라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고 내 안에서 아우성치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 목소리를 따라 나는 여기까지 왔다. 내 그림들 그리고 내 일상이 새로운 빛깔로 반짝인다. 이 새로운 반짝임에 목말라 나는 이토록 멀리 떠나와야 했던 것이다.
그림_박현경, 「하늘, 땅, 나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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