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줄의 우연
박현경(화가)
1.
모델의 움직임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는 온 감정을 실어 팔을 뻗고 다리를 굽히고 목을 숙였다. 허공을 향해 던지는 눈빛에조차 어떤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 움직임을 받아쓰기하듯 그림으로 옮겼다. 그날따라 내 손이랑 크레용이 뜻대로 잘 움직여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서울에서 누드 크로키를 마치고 청주로 돌아오는 버스 안, 마음속 깊이 차오르는 뿌듯함에 혼자 웃었다.
2절지 수채화 용지를 펼치며 마음이 설렜다. 분무기 통에 물을 붓고 물감을 풀었다. 나무젓가락으로 휘저은 후 뚜껑을 닫고 힘껏 흔들었다. 신나게 흔든 다음, 종이에 물감을 뿌렸다. 분무기 속 보랏빛 물감이 촤악촤악 뿜어져 나오는 걸 느끼며 나는 조용한 해방감을 맛봤다. 보라색 물감이 없어 빨강과 파랑을 섞어 만든 물감의 색깔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물감이 흥건히 고이는 곳들은 고이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곳들엔 물감이 마르면서 은은한 무늬가 생겼다.
크로키 북을 한 장씩 넘기며 ‘괜찮은’ 크로키들을 골랐다. 포스트잇으로 표시해 뒀다가 가위로 오렸다. 쓱싹쓱싹 잘리는 종이의 질감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인체 형상들이 종이 인형처럼 잘려 나왔다. 보랏빛 물감이 다 마른 2절지 위에 그 형상들을 이리저리 배치해 봤다. 그렇게 해서 결정된 자리에 형상들을 풀로 붙였다. 형상들은 함께 있으면서도 하나같이 몹시 외로워 보였다. 그래서 ‘혼자라고 느낄 때 부르는 노래’라고 제목을 붙였다.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힘들 때 부르는 노래’, ‘다시 일어설 때 부르는 노래’, ‘네가 보고 싶을 때 부르는 노래’ 등 노래 연작을 작업했다. 이 연작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이 연작을 작업하며 나는 우연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 모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더라면, 모델이 그 포즈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아예 다른 모델이 배치됐더라면, 아니면 내가 그날 크로키 모임에 가지 않았더라면, 물감 혼합이 다른 식으로 되었더라면, 이 지점이 아닌 다른 지점에 물감이 고여 무늬가 생겼더라면, 그 수많은 우연이 기가 막히게 서로 만나 주지 않았더라면, 이와 같은 작품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2.
아기 고양이는 자꾸만 사차선 도로를 건너갔다 건너왔다 했다. 그러다 어느 토요일 저녁, 차에 부딪혀 높이 날아 떨어졌다. 지나가던 여고생 M이 이 장면을 보았다. M은 고양이가 떨어진 곳으로 달려갔다. 고양이는 아직 살아 있었다. M이 신고해 고양이는 처음엔 시청으로 다음엔 반려동물보호센터로 옮겨졌다. 골반이 두 군데 부러진 채로였다.
M의 담임교사였던 나는 별 생각 없이 M과 얘기를 주고받다가 이 고양이의 사정을 알게 됐다. 마음에 걸려 견딜 수가 없었다. 반려동물보호센터 측과 통화를 했다. 한 번 데려가면 절대 다시 데려올 수 없고, 치료하는 데 돈이 꽤 많이 들 거라고 했다. 데려가 치료해 줄 사람이 오늘 중에 나타나지 않으면 오늘 밤 안락사 조치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하루 종일 머리가 깨지도록 고민한 끝에 퇴근하자마자 남편과 반려동물보호센터로 갔다. 입양 신청서를 쓰고 봉순이를 데려왔다. 그렇게 봉순이는 우리 가족이 됐다.
그날 봉순이가 차에 치일 때 M이 그 길을 지나고 있지 않았더라면, 지나고 있었더라도 그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더라면, 보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고 그냥 지나쳤더라면, 내가 학교에서 M이랑 얘기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수많은 우연이 기가 막히게 서로 만나 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가족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3.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동은’은 ‘연진’에게 말한다.
“여기까지 오는 데 우연은 단 한 줄도 없었어.”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까지 오는 데 아주 여러 줄의 우연이 있었어.”
빛나는 우연들이 만나 오늘이 되었다.
오늘도 삶은 빛나도록 우연하다.
그림_박현경, 「혼자라고 느낄 때 부르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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