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빌 일기
박현경(화가, 교사)
2024년 1월 29일 월요일 오후, 청주 집
모든 준비를 마쳤고, 내일 새벽 출발하는 일만이 남아 있다. 주님, 이 모든 일 주님의 선하신 뜻으로 축복해 주시고, 주님의 지혜로 손수 이루어 주십시오.
2024년 1월 31일 수요일 오전, 파리 벨빌(Belleville) 숙소
한 시간 후면 그림들 이끌고 전시장에 설치하러 간다. 묘한 설렘과 긴장. 모든 일이 다 잘되리라는 걸 난 이미 알고 있다.
같은 날 오후, 카페 플뤼랄
설치를 마치고 쓴다. 그동안 온라인으로 만나던 발레리, 레아, 하울을 드디어 직접 만났다. 인사를 나누고 작품 포장을 풀고 전시장에 이리저리 배치하면서, ‘뛰어넘다(franchir)’라는 주제로 각자 작업해 온 결과물을 공유했다. 발레리, 레아, 하울, 나, 우리 남편이 힘을 합쳐 작품 설치를 했다. 크리스틴은 오늘 급한 일이 있어 오지 못해 크리스틴 작품도 우리가 걸었다.
2024년 2월 2일 금요일 오전, 숙소
어제 오전에 남편이랑 20분 정도 걸어서 금속 가게에 가서 자그맣고 반질반질한 동판 두 개를 사 왔다. 내일 아침 하울과 함께, 나로서는 중학교 이후 처음으로 금속 판화를 해 볼 생각에 무척 설렌다.
오늘 새벽 3시 반쯤이었나, 문득 잠이 깼을 때, 내가 어쩌다 이렇게 큰일을 벌였을까, 만일 전시 판매 성과가 좋지 않다면, 이 큰 짐을 끌고 프랑스까지 왔다 가는 게 무슨 의미일까, 내 제안으로 모인 이 아티스트들(발레리, 레아, 크리스틴, 하울)에게 내가 미안한 일을 벌인 건 아닐까 하는 복잡한 생각이 별안간 내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 상태로 잠이 들었다가 더 푹 자고 나서 깨니, 그런 회의적인 생각은 쏙 들어가고 설렘이 되살아났다. 판매 성과는 중요하지 않다. 이 먼 곳에 와서 이곳 사람들과 소통하고 즐겼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오늘은 베르니사주(vernissage, 전시 오프닝 파티)가 있는 날. 많은 사람을 만나 신나게 수다 떨고 술도 마시고 즐겨야 하므로, 오전 동안은 집에 틀어박혀 쉬기로 한다.
2024년 2월 4일 일요일 오후, 갤러리
어제 하울의 판화 수업에 참여해 나의 첫 판화 작업을 하는데, 눈물이 핑 고일 정도로 좋았다. ‘육체 노동’. ‘물질성’.
전시장에 도착해 셔터문을 올리고 들어가 난방을 켜고 조명을 켜고 통유리창 셔터들을 올리고 바닥 청소를 하는 순간순간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하다.
2024년 2월 7일 수요일 오후, 갤러리
4시 44분. 발레리랑 하울이랑 셋이 앉아서 책도 읽고 수다도 떨고 핸드폰도 들여다보며 포도주 한 잔씩을 홀짝이는 이 시간. 너무나 행복하고 소중하고 감사하다.
2024년 2월 10일 토요일 새벽, 숙소
설날을 파리에서 맞고 있다. 어제 저녁엔 어쩐 일이었는지 ‘내가 아무것도 아닐까 봐’ 두려운 마음이 마구 되살아났었다. 피곤해서 그랬나 보다.
오늘은 오전에 하울이랑 판화하는 날. 물고기, 꿈꾸는 물고기를 새기자.
같은 날 저녁, 숙소
지금 기분은 어제 저녁과는 전혀 다르다. 기분이 좋고 자신감이 든다. 오늘은 갤러리에 발레리의 남편 브뤼노와 딸 모르간, 그리고 크리스틴의 딸 소냐가 왔다. 브뤼노, 모르간, 소냐가 그림에 대한 내 설명을 주의 깊게 들어 주고 칭찬을 많이 해 줘서 기분이 좋았다. 갤러리 문 닫기 전 40분 정도 브뤼노랑 발레리랑 한국 문화, 내 경험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눈 시간도 참 좋았다.
2024년 2월 11일 일요일 오전, 카페 플뤼랄
이번 체류 기간 중에 즐기는 마지막 일요일이자 전시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하루하루 한 순간 한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하고 가슴이 뭉클하다. 위대한 하울과 함께, 그리고 크리스틴, 발레리, 레아와 함께 전시를 했다는 점, 이들과 엄청나게 수다를 떨고 이야기 나눈 모든 순간, 또한 이들 모두 이 전시에 대해 만족스러워한다는 사실, 이 모두가 감사하다.
2024년 2월 21일 수요일 새벽, 무극 관사
벨빌에서 쓴 일기를 찬찬히 읽어 보니, 나는 참 줄기차게도 두려워하고 의심하다가, 또 줄기차게도 안심하고 감사했구나. 창밖이 서서히 밝아 오고 오늘 출근해서 할 일들이 빼곡한데, 결국 난 또 안심하고 감사할 것이다. ‘모든 일이 다 잘되리라는 걸 난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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