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식지/마음거울

슬픔이 기쁨에게

by 인권연대 숨 2024. 5. 27.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나미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위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슬픔이 기쁨에게(창비, 1979)

'소식지 > 마음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을 보는 법  (0) 2024.07.26
가장 위험한 동물  (0) 2024.06.25
새로 돋는 풀잎들에 부쳐  (0) 2024.04.25
헛것을 따라다니다  (0) 2024.03.26
밑번들  (0) 2024.02.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