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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마음거울

꽃을 보는 법

by 인권연대 숨 2024. 7. 26.
꽃을 보는 법

 

복효근

 

 

꽃이 지고 나면 그뿐인 시절이 있었다

꽃이 시들면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던 시절

나는 그렇게 무례했다

 

모란이 지고 나서 꽃 진 자리를 보다가 알았다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다섯 개의 씨앗이

솟아오르더니 왕관 모양이 되었다

화중왕이라는 말은

꽃잎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모란꽃은 그렇게 지고 난 다음까지가 꽃이었다

 

백합이 지고 나서 보았다

나팔 모양의 꽃잎이 지고 수술도 말라 떨어지고

나서 암술 하나가 길게 뻗어 달려있다

꽃가루가 씨방에 도달할 때까지 암술 혼자서

긴 긴 날을 매달려 꽃의 생을 살고 있었다

 

꽃은 그러니까 진 다음까지 꽃이다

꽃은 모양과 빛깔과 향기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랑이 그러하지 않다면

어찌 사람과 사랑을 꽃이라 하랴

 

생도 사랑도 지고 난 다음까지가 꽃이다

 

 

 

- 고요한 저녁이 왔다(역락,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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