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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마음거울

연푸른 혀들

by 인권연대 숨 2024. 9. 26.
연푸른 혀들

 

김해자

 

이른 아침부터 참새도 할 말이 많다 중구난방 회합장이 된 이 집 지붕은 누구 것인가, 하품 늘어지게 하며 묻는 사이에도 우르르 날아오는 이 밭은 무료 급식소, 옆집 굴뚝에 세사는 딱새들이 쪼아 먹어도 군말이 없다

 

황금조팝 겨드랑이에서 노란 혀들이 솟아나고 있다 진군 명령 없어도 알아서 포복한다 잔디는 일렬횡대로 어깨를 겯고 부추도 장딴지에 힘을 준다 뿔이다 안간힘으로 밀어 올리는 푸른 비명이다 멍이다 숨어 지내던 갓도 깃대를 세우고 사철나무에 더부살이하던 더덕도 혀를 내민다 뽕나무 그늘 귀퉁이에서 꽃마리가 떨고 제비꽃이 수줍게 환호한다

 

등기권리증이 통하지 않는 거주지

이 공화국엔 형형색색 깃발들이 나부낀다

기지개 켠다 벌과 나비도

추위와 배고픔을 증명하지 않아도 기초수급은 된다

 

아무도 명령하지 않지만 법은 지켜진다

찌르지 않는다 화살나무 가지마다 화살 빽뺵해도

상사화 잎과 긴병풀꽃은 무사하다

 

잔디 파고들어도 개망초 밀어붙여도 저마다 일가를 이루었다 옹색한 지하방 붙어 잘수록 식구도 늘었다 온몸이 굴삭기인 지렁이도 새끼를 쳤다 바위가 엉덩짝 하나 내주어 고향도 본적도 모르는 초롱꽃과 돌나물도 문패를 달았다

 

연푸른 혀들이 공중을 소요한다

붉고 노란 꽃 무더기들이 산비얄을 내려온다

싸리 순과 다래 순과 산고추나물이 텃밭에 부려진다

 

제 이름으로 땅 한뙈기 소유하지 않아서

사시사철 산은 보살들 것이다

텃밭 공화국이다

 

 

- 니들의 시간(창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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