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지성과 집단 감성
이내
1985년 2월, 경기도 연천에서 제12대 총선 투표를 했다. 군 부재자투표였다. 투표일 한달 전부터 밤마다 기호1번 민정당을 찍어야 한다는 정신교육을 받았다. 영외 보급중대로 전체 80여명이었다. 한명씩 들어가는 기표소는 중대 CP에 차려졌다.
1번 민정당 정종택, 2번 신민당 김현수, 3번 민한당 신경식, 4번 국민당 이인기. 아무도 없는 데다 기표대 가림막까지 쳤지만 투표 직후 개함할 게 뻔했다.
잠시 망설이다 2번을 찍었다. 다음날 아침, 근무 중이던 위병소로 중대장이 올라왔다. ‘넌 중대장이 돌격 앞으로라고 명령해도 뒤로 도망갈 새끼’라는 말과 함께 발길질이 시작됐다. 정강이를 대여섯 차례 걷어차였다. 나중에 광주 출신 유하사까지, 야당 표는 단 두 표였다는 얘기가 돌았다.
1992년 3월 14대 총선 다음날 아침, 경기도 파주 제9보병사단 이지문 중위는 출근하지 않았다. 그는 한겨레신문에서 인터뷰한 뒤 종로YMCA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날 지휘관과 간부들의 부정선거 강요와 협박 사실을 폭로했다. 그는 무단이탈, 허위사실유포, 명예훼손 혐의로 3주간 영창에 갇힌 후 이등병으로 강제전역 당했다. 이후 3년에 걸친 법정싸움 후에야 복권될 수 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나 그의 무료 법정대리인이었던 안상운 변호사와의 인연으로 이지문 예비역 중위를 만났다.
그는 2011년 ‘추첨민주주의’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투표제도의 왜곡과 조작에 대한 대안으로 추첨 방식을 제안했다.
인지도가 높거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만 당선되는 선거의 한계를 지적했다. 평범한 시민들이 무작위로 뽑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민주주의 본연의 모습이라는 게 골자다.

추첨민주주의의 기원은 고대 아테네의 Lotocracy, 또는 Stochocracy로 알려졌다. 아테네인들은 500인 평의회 위원이나 법정 배심원 등 대부분의 공직을 추첨으로 선발했다. 이를 통해 성별, 연령, 직업 등 사회적 인구통계를 그대로 반영한 '작은 사회'를 의회에 구성했다. 정경유착 등 부패 소지를 없애고 진영간 소모적 정쟁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고도의 전문성을 가질 수 없다는 한계가 걸림돌이 된다. 또 한번 하면 그만이라는 무책임성 또한 문제다. 시민이 직접 지지하는 인물을 선출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6•3 지방선거를 앞둔 지금 다시 추첨민주주의를 생각한다. 정직하지 않은 선거 풍토는 상존하기 때문이다. 과거 군부재자투표나 관권선거, 돈선거는 사라졌다. 하지만 이보다 더 치밀한 구조적 모순의 흐름에 시민은 무방비로 떠내려 간다. 언론의 ‘거두절미’ 보도 행태 이면에 정치모리배들이 활개친다.
민주당 한 초선 의원이 했다는 ‘우중정치’ 발언에 분노한다. 그러나 이른바 열성 당원 중 일부의 막무가내 편가르기와 날선 상대 진영 공격은 되돌아봐야 한다. 이성이 배제된 정치판은 민주주의를 좀먹는다.
선거는 집단지성을 모토로 한다. 이를 통해 가장 합리적으로 가장 도덕적이고 유능한 공직자를 뽑을 수 있다고 믿는다. 믿고 싶고 믿으려 한다. 그럴 뿐,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명박을 뽑았고 박근혜를 뽑았으며 마침내 윤석열과 충북에선 김영환을 뽑았다. 또 민주당 당내 경선에서 국힘당 언저리를 맴돌다 떨려나온 예비후보를 맹목적으로 떠받든다. 집단지성은 때로는 작동하지만 때로는 멈춘다. 집단감성이 작동하면 선거는 망한다.
제5공화국 경기도 연천의 썰렁한 군부재자투표소와 제6공화국 파주에서 서울 가는 택시에 올랐던 이지문 중위를 생각한다. 추첨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제대로 보고 제대로 골라 제대로 찍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가 산다. 내가 살고 내 아들과 딸들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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