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식지/수희씨와 책읽기(종료)

<제53호> 시 읽기, 그 쓸쓸함에 대하여_이수희(충북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국장)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19. 10. 22.

 

늦더위가 여전하지만 그래도 가을이다. 가을은 좀 쓸쓸하다. 육아에 바쁜 나에게도 시나브로 쓸쓸한 기운이 파고든다. 이럴 땐 뭘 하면 좋을까. 파란 하늘을 따라 들로 나가도 나쁘지 않을 테고 극장에 홀로 앉아 영화를 봐도 좋겠다. 그중에서도 가장 멋진 일은 서점에 가서 시집을 사고 시를 읽는 거다. 겉멋이라 비웃어도 좋다. 가을엔 시를 읽고 싶다.

 

시는 참 어렵다. 나는 글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시는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쉽게 읽히는 시도 있지만 내게는 어려운 시가 더 많다. (더 어려운 건 시집 마지막에 붙어 있는 해설이라는 글이다. 대체 무슨 이야길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는 글들이 참 많다. 시를 설명해주는 글을 읽다 내팽개친 시집도 여러 권이다.) 그런데 어려운데도 자꾸 마음이 가는 시들이 있다. 잘 모르겠지만 시 속 화자의 마음을 알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어떤 그림이 자꾸 떠오르는 시들이 있다. 그런 시들은 마치 호기심을 끄는 낯선 사람 같아서 자꾸만 알고 싶어진다. 이 가을, 내가 고른 시집은 유진목 시집 <연애의 책>, 그리고 이병률 시집 <바람의 사생활>이다.

 

<연애의 책>, 제목만 들어도 참 좋지 아니한가. 연애라는 말은 사람을 달뜨게 하지만 유진목 시인이 그려내는 연애는 마냥 뜨겁거나 달콤하지 않은 듯 싶다. ‘연애를 주제로 한 시들이니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그린 시도 빠지지 않는다. “갓 지은 창문에 김이 서리도록 사랑하는 일을”(잠복), “우리는 둘이 되어 손을 잡고 내려왔다” (동산), “어쩌다 이렇게 많은 꽃을 터뜨렸을까/ 부끄러울 사이도 없이/ 발기발기 흩어지는 분홍의/ 근데 너는 누구니?/ 무더기로 쏟아지는 꽃잎/ 까르르 웃는 봄날처럼”(벚꽃여관), “우리는 동그랗게 아야 어여 오요 우유 으이 가느다란 입술이었다가 오므란 입술이었다가 벌어진 입술로 누워 있는 사이 속옷을 아무렇게나 벗어서 발끝에 거는 사이” (사이).

그런데 이 사랑이 마냥 뜨겁지 않다. 혼자 남은 여자는 너무나 쓸쓸하다. “혼자서 잘 있어야 한다고 일기에 적었다 남은 소주를 마시고 일찍 잤다 어쩌다 잘못 깨어나면 밖으로 나가 한참만에 돌아왔다 내일은 다른 집에 있는 꿈을 꾸었다/ 집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았다 / 나인 것 같았다” (혼자 있기 싫어서 잤다).

<연애의 책> 시집 속 여자는 당신을 향해 외친다. “매일같이 당신을 중얼거립니다 나와 당신이 하나의 문장이었으면 나는 당신과 하나의 문장에서 살고 싶습니다 (중략) 당신이 있고 쉼표가 있고 그 옆에 내가 있는 문장 나와 당신 말고는 누구도 쓴 적이 없는 문장을 더는 읽을 수 없는 곳에서 나는 깜빡이고 있습니다 ” (당신, 이라는 문장). 한 문장에서 살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당신인데 당신에게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한가보다. “어디로 가야 당신을 볼 수 있습니까 모든 게 다 당신이야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당신에게만 있는 것이 고맙습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세요 내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첩첩산중).

어떤가. 그들의 사랑을 계속 지켜보고 싶지 않나. 시집을 계속해서 읽어나가게 하는 힘이 있는 시들이다. <연애의 책>에는 조재룡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실렸다. 조재룡은 해설 끝부분에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읽는 게 너무나 좋은 시들로 가득하다며, “매우 뛰어난 방식의 사랑에 대한 기술(記述)이자 연애의 마음을 눅눅하게 받아 적은 필사의 기록으로 끝내 당신을 죽인다고 썼다.

 

유진목의 시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쓸쓸하다. 죽음, 혹은 이별, 생의 쓸쓸함을 이야기하는 이병률의 시는 더 쓸쓸하다. “혼자 죽을 수는 없어도 같이 죽을 수는 있겠노라고 낯선 눈빛이 낯선 다른 눈빛에게 말을 건다 살아서는 알지도 만나지도 못한 영혼이/ 여인숙으로 들어가 나란히 꽃으로 타고 금으로 타니 / 베고 누울 것 없어도 되겠다”(황금포도 여인숙), “나의 일일 것이므로 나는 그것이 얼마만큼의 비극인지 모른다/ 달과 함께 묻힐 거라면 달은 어쩌면 내가 낳은 아이일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누운 나를 애써 모른 체하고 / 내 온몸의 동굴 속을 빠져나가는 황량한 바람만을 생각하면 그뿐”(내 일요일의 장례식), “추운 밤 사이 강물도 얼었나보다 / 강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가 얼음 속을 들여다보니 고래 한 마리 얼어 있다 / 그도 죽으려 했나보다 / 고래 속으로 들어가 몸을 서로 녹여도 좋겠다 ”(강변 여인숙). 시 속 사내는 자꾸만 죽음을 생각하나보다. 그 사내는 바람으로 만들어졌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 열 사내를 스물, ,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 바람의 습관들 /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년을 흘렀던 것이다 /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바람의 사생활) 그는 바람처럼 여행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갔는지, 이 가을 또 어딘가로 삶을 짊어진 채 길을 나섰을 듯 싶다.

 

사랑, 연애, 여행, 바람. 고단한 삶에 작은 위로가 되는 말들이다. 이 가을 어딘가로 떠나기 힘든 이들에게, 삶이 시시하기만 한 이들에게 를 읽자고 말하고 싶다. 가을이니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