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인에서 ‘아동 흙밥 보고서’라는 기획연재를 봤다. 필자는 <아이들에게 식사를 “필요한 열량을 채우는 행위”가 아닌 “나와 타인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여유”로 가르쳐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현 상황을 알리기 위해 이 글을 쓰게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기사는 불평등이 가면 갈수록 심화되어가는 상황에서도 아이들의 밥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이유로 슬픈 하향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며 구체적 사례들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대안들까지 소개하고 있다.
기사를 읽으며 먹는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일지 고민해 보았다. 나는 사람을 만나서 밥을 먹을 때나 주 1회 내지 2회 혼술과 함께 식사를 할 때는 잘 갖춰서 먹고자 한다. 하지만 그 외에 하루 식사 중 점심을 제외하고는 체중조절 겸 해서 의도적으로 한 두 종류의 음식을 소량으로 먹으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기사에 대해 묘한 공감이 갔다.
솔직히 어릴 때에 나에게 먹는 것은 일종의 스트레스였다. 먹는 것 자체를 싫어한 건 아니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먹는 것, 특별히 맛있는 음식 먹는 것은 내 삶의 즐거움 중 하나이다. 하지만 아홉 살 이후부터 수도공동체를 나와 자립하기 전인 26세까지 체중조절에 대한 압력을 받으며 반 강제적인 식단조절을 해야 했다. 항상 식사량 자체를 적게 해야 했으며 아주 어린 시절에는 저칼로리 시리얼로 질릴 정도로 식사를 해야 했던 적도 있었다. 기름진 음식, 특별히 고기 앞에서는 어른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음식 앞에서 배제를 당하기도 했다. 구체적인 예로 나와 함께 지내던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에게 간식이 주어질 때 내 것은 빠져 있곤 했다. 설령 내 것이 있어도 스스로 먹지 않으려는 것처럼 이야기를 했었다. 무엇보다 청소년기에는 단체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식사는 함께 하지 못한 채 따로 했다. 당연히 내가 먹고 싶은 음식과 그 양을 선택할 수 없었다. 더욱이 당시에 나와 함께 지내던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내가 밥 먹는 것을 지원해 주곤 했었는데 나한테 주어진 음식 중 맛있는 것들은 한두 개씩 뺏어 먹기도 했었다. 그것 때문에 아이들과 목소리를 높이며 싸웠던 기억이 있다. 싸우고 나면 고작 먹는 거 같고 치졸하게 싸웠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으로 괴로워했다. 먹는 것이 나에게는 일종의 즐거움이자 괴로움이었기에 먹는 것에 대한 고민을 담은 이 기사가 내게는 상당한 의미로 다가왔던 거 같다.
현재의 나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비교적 자유롭게 먹는다. 내 식사의 형태가 그렇듯 나 역시 모든 식사가 영양이 균형 잡히고 관계에 기반 되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평등함과는 거리가 먼 과거의 밥상으로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다. 그렇기에 위에 소개한 글에서 식사를 돌봄과 연결시키는 부분에 대해서 약간의 의구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필자는 돌봄의 형태를 전통적 가정이 제공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으며 밥 거점이라는 사회적인 식사 네트워크를 소개하고 있다.
기사의 모든 부분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난 우리 모두가 최소한 무엇을 누구와 함께 먹을지에 대하여 즐거운 고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음식 자체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무엇인가를 먹는 순간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시라도 쉬어갈 수 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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