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 연수에 아이를 데리고 갔다. 3박4일간 진행하는 연수 기간 동안 아이를 맡길 데가 없었다. 다행히 함께 간 다른 활동가들이 흔쾌히 이해해줬고, 아이도 여행 내내 별 탈 없이 잘 따라주었다. 여행을 하면서 아이가 참 많이 컸구나 싶어 뿌듯했다. 사실 처음엔 망설였다. 아이를 데리고 공적인 일을 하러 가는 게 아무래도 내키지 않아서 그랬다. 워킹맘이긴 하지만 최대한 일의 영역에 아이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2월 남편이 다른 지방으로 발령을 받은 이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주말을 제외한 평일엔 아이를 돌보는 일과 가사가 오롯이 내 몫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책임져야 한다. 다행히(!) 나는 9시에 출근하지도 6시에 퇴근하지도 않아도 되기에 그럭저럭 버틴다. 그래도 일은 생기기 마련이니 그때마다 아이를 어디에 맡겨야 하나, 누가 돌봐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래도 지금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늦게는 오후 6시30분까지 유치원에서 아이를 맡아주니 말이다.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12시가 되기도 전에 집에 온다는 말이 괴담처럼 무섭기만 하다.
나는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편은 아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예쁜 상차림에 밥상도 차려주지 못하고, 엄마표 놀이도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다. 다른 이들 앞에선 쿨하게 “학교 가서 배우면 되지 뭐”하면서 공부도 시키지 않는다. 화려하진 않아도 밥은 꼬박 해먹이고, 책도 늘 읽어주니까 괜찮겠지하며 위안을 삼을 뿐이다. 여느 젊은 엄마들처럼만큼 극성을 떨 정도로 체력이 받쳐주지도 않고 시간도 없다. 육아는 늘 버겁기만 하다. 지금보다 더 육아에 힘들었던 시기에 정아은의 책 <엄마의 독서>를 재미나게 읽었더랬다. 책읽기를 통해 좋은 엄마라는 통념에 맞서 자신만의 육아 철학을 찾아갔던 작가의 이야기를 공감하면서 읽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성실히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하는 작가를 보면서 ‘수희씨와 책 읽기’ 원고를 겨우 쓰면서도 잘 쓰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나는 여전히 한 달을 간신히 써나가는 데 정아은 작가는 그동안 또 많은 책을 읽고 책을 펴냈다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이라는 책이다.
‘집에서 논다’는 말은 특별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흔한 말이다. 특히 전업주부들의 가사 노동을 별거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대표적인 표현이다. ‘집에서 놀면서 뭐해. 당신이 해야지. 아이들이 엇나가기라도 하면 집에서 놀면서 애도 안보고 뭐하는 거야”라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많이 해오지 않았던가! 정아은 작가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집에서 논다”는 말의 연원을 찾는 과정을 통해 성찰한다. 그 과정 속에서 읽은 책들이 마르크스의 <자본론>, 게오르크 지멜의 <돈의 철학>, 카트리네 마르살의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낸시 폴브레의 <보이지 않는 가슴> 등이다. (정아은 작가가 이번 책에서 소개한 15권 책들 가운데 난 단 한 권도 읽지 못했다.)
이들 책을 읽으면서 작가는 자본주의가 가사 노동을 폄하하고 있다고, 노동자들이 다시 일터로 나가서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집에서의 여러 돌봄을 공짜로 해주지 않느냐며 주부들의 노동은 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우리가 배워 온 경제학이 여성이 행하는 노동을 통째로 배제해왔다고 비판한다. 또한 아이는 공공재인데, 부모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경우 사회가, 국가가 대신 부모 역할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지금이야말로 돌봄 노동이 새롭게 조직되고 배분되어야 하는 때인데, 국가와 사회제도는 여전히 돌봄을 여성에게만 맡겨두지 않느냐고 따진다. 정아은 작가는 세상에 아내라 불리는 주부가 없다면 자본주의는 일거에 무너질 것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국가가 나서서 재생산 노동을 재조직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작가는 “여성은 나이들수록 혁명적으로 변해 간다”고 말한다. 나이들수록 세상 모든 것이 남성을 기본값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 나도 그렇다. 페미니스트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살면 살수록 불합리함에 마주 선다. 세상 모든 엄마들이 그러할 것이다. 오는 11월30일엔 가사/돌봄 사회화 공동 선언 기자회견이 열린다. 나도 기꺼이 서명에 동참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돌봄 혁명으로 인간의 존엄· 연대 평등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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