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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계속 쓰기

by 인권연대 숨 2024. 1. 26.
계속 쓰기

 

잔디

 

가방 안에 네 가지가 더 들어가 있다. 다이어리, 은유 공책, 모닝페이지 공책, 이번 주의 시집.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들의 겨울방학 시기 따라 준비된 일정으로 개강할 수 있게 된 수업. 수강자 수가 부족하여 세 번 정도 열리지 못했던 시 수업. 들을 수 있어서 좋다. 시를 통해 결국은 삶의 비밀을 품거나, 삶의 가벼움을, 자유로움을 문득 알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도 재미있다.

 

이 수업을 시작하면서 시인 강사는 제안을 한 가지 하였다. ‘계속 쓰기의 작업으로 아침마다 547분 즈음에 줌으로 열어 놓을 터이니 모닝페이지를 함께 써보자는. 언니들과 하는 독서모임에서 모닝페이지를 제안하고 한동안 쓰다가 그 작업을 멈춘 나로서는 정말 고마운 제안이어서 함께 하고 싶다고 번쩍 손을 들었다. 아침에 문득 일어나 눈곱도 떼지 못하고, 식구들이 아직 자고있는 터라 살금살금 움직여, 때론 일어나기 힘들어 엉금엉금 기어가서 의자에 앉아 스탠드 조명을 낮게하고, 휴대전화 속에서 나와 비슷한 행태로 집중하여 혹은 딴청하기도 하며 무언가 각자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사람들과 마주하고 고요히, 어깨가 연필을 밀고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어떤 생각도 검열하지 않고 그냥 계속 쓰는 나를 아침마다 발견하는 일은 나에게 삶의 생동력이다.

 

그리고 함께 하는 이들을 향한 고마움이다. 주말엔 모닝페이지보다 애프터눈페이지를 쓰기도 하지만, 월화수목금 아침마다 어떤 생각도 비난하거나 탓하거나 그렇다고 지나치게 찬탄하거나 우쭐대거나 하지도 않고 고요 속에 그냥 계속 쓸 수 있다는 자체가 기쁘다. 그래서 집을 정리하다 빈 공책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나는 가졌고 그냥 앉아서 쓰기만 하면 되니까. 오늘의 모닝페이지는 아무말 대잔치이기에 오늘의 나를 오늘의 내가 읽는 형식이 아니라 8주 후에 읽는 형식이다. 아 두 달 전의 나는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구나. 혹은 마음에 드는 글감을 그곳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공책은 타인에게 발각되면 안 된다. 자유성이 보장되기는 하나, 자유로운 아이의 귀염성보다는 위험성이 더 많이 담겨있을 수 있기에. 내가 아직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어떤 미사일이나 핵무기보다 위험할 수 있다. 무튼 그 공책이 가방 속에 있다.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다이어리. 어린왕자가 그려져 있는 하얀 다이어리. 지난해가 다 가기 전에 준비해 두었고, 2024년 첫 날부터 꼬박꼬박 쓰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쓰고 있다. 짝짝짝. 다이어리가 공책이 되지 않도록, 낙서장이 되지 않도록. 나는 계속 쓸 것이다. 모닝페이지 공책이 자유로움이라면, 다이어리 쓰기는 기록자의 한 행태이다. 하루일과 중에 기억나는 장면과 닿아있는 단어라든지 그 일로 인해 든 생각을 짧은 문장으로 적는다. 더 길게 쓰고 싶은 내용은 다이어리 뒷부분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공간에 더 적어본다. 지나가면 잊히는, 기억하고 싶지만 곧 잊어버리는 나는, 다이어리에 쓰여 있는 나의 글씨를 사랑한다. 기록하려고 시도하는 나를 지지한다. 계속 쓸 것이다. 얼마만에 기록자로서의 삶을 다시 시작한 것인지…….

 

그리고, 은유 공책. 눈 밝은 동시 독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나는, 그냥 독자로 살 것인지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 살 것인지(좀 더 치열하게 쓰는 일을 할 것인지)를 자주 선택하라고 그 구석으로 나를 미는 습관이 있다. 자주 시인, 같다, 라는 소리를(아이고……)듣지만 등단 시인은 아니어서, 아니 등단하고 싶은 마음을 키우고 있어서, 등단해도 하지 못해도 나는 나이지만……나에게 새 이름을 주고, 새롭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은 나에게 힘이 되니깐. 글을 읽다가 갖고 싶은 표현이라든지, 오늘 생성된 나의 문장 중에 마음에 드는 직유나 은유를 담아놓는 핑크빛 노트를 마련하였다. 이 공책을 따로 준비하고 보니, 세상엔 내가 훔치고 싶은 문장이 많다는 걸 더 실감하게 되어 지금보다 내가 더 잘 쓸 수는 없겠지만, 조붓하게 난 나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겠다는, 나의 글을 쓸 수 있겠다는 마음과 나의 고유성을 담은 글이 무엇일까 더 궁금해져서 그 점이 상당히 마음에 든다. 결국은 또 계속 쓰기.

 

그리고, 한 권의 책. 지금은 이번 주에 읽고 리뷰를 써야 하는 고향에 계신 낙타께가 들어있지만, 한동안은 아티스트 웨이, 또 한동안은 계속 쓰기, 또 한동안은 복원치료를 넣고 다녔다. 좀 더 나은 내가 되려고 하거나, 좀 더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양육자가 되려고 하거나 보이지는 않지만 내면에 상처받은 아이가 있다니 그 아이를 만나고 보듬어주려고 하거나 하면서 그것에 도움이 되는 책을 넣고 다니며 짬이 나면 읽고, 짬을 내어 읽고 또 읽었다. 지금의 내가 이미 충분하다고 말해 주는 문장도 갈증으로 읽어내는 묘한 재주를 습득한 나는 나를 고치고 또 고치려 했으나, 지금 조금쯤. 지금에 머무른다. 그래서 지금에 머무르는 나를 돕는 방법으로 계속 쓰기를 올해에는 장착하였다.

 

한 시인의 시 아홈 살 시인 선언이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는데 시의 전문은 기억나지 않지만, 시인은 연필과 수첩이라는 무기로 아름다운 시를 쓰는 사람이고, 자신에게는 백 살까지 쓰고도 남을 연필과 수첩이 있어서 자면서도 쓸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미 충분한 양의 연필과 공책이 있다는 것이 그 시의 내용과 나의 공통점이다. 묘한 위안. 이미 충분한 연필. 이미 충분한 공책. 나는 계속 쓸 것이다. 그것을 내가 읽을 것이다. 그것만이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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