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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나에게, 그리고 그대에게

by 인권연대 숨 2025. 1. 27.
나에게, 그리고 그대에게
잔디

 

다들 안 온다고 하면 우리 딸 혼자라도 오라고 그래.”라는 문장이 있다. 큰 딸, 큰 애라는 호칭이라 아니라 그냥 우리 딸.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딸이 될 수 있지만, 여기에 오롯이 하나인 우리 딸. 나는 그 우리 딸이다. 유리 같은 마음이지만 유리는 또 우리 딸만큼은 아니어도 다양한 유리가 있으니, 이제 유리 같은 마음이라 말하여도 방탄차의 유리를 상상할 수도 있기를.

어떤 경위로든 두려움과 불안은 내 속으로 들어와 잠식한다. 과거에 내가 경험한 숱한 순간들. 그 순간들 속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내가 있었다. 그 어쩔 줄 몰라 하는 마음은 행동이 되기도, 생각이 되기도 감정이 되기도 하였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아이가 자라나 혼자 서있는 지금에도 여전히 그 행동이, 그 마음이, 그 생각이 그 혼자 서있는 어른속의 아이를 흔들 때가 있다. 그래서 그 어른아이는 어른이 아닌 아이가 되어 울고 마음을 찢고, 생각 속으로 잠식한다. 물론 숨 쉬며 이 순간의 나를 자각하고, 이 감정이 어디에서 온 걸까 인식하고, 이 생각이 정말 진실할까 조사하기도 한다.

 

나의 불안은, 나의 두려움은 나에게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고 말한다. 부족하거나 무얼 잃어버리지 않았는데도 현실 속에서 무언가 아껴야한다고, 다 쓰고 난 치약뚜껑도 어딘가에 쓸모가 있을 테니까 버리지 말라고 말하고, 냉장고 속의 반찬통에 남은 어떤 것도 이건 누가 준 것이니까 이건 또 누군가의 마음이 담긴 의미 있는 거니까 버리지 말고 말한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브레이크를 걸지 않지만(장바구니에 담고 보름 동안 팔짱끼고 지켜보기도 하지만), 나에게 무언가 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안사면 안 돼? 더 싼 것은 없어? 진짜 사야 돼? 라고 자꾸 물어서 성가시다. 성가시지만 꼭 끌어안고 있는 목소리이다. 직장은 바뀌었지만, 거의 삼십 년 동안 같은 업종에 종사하면서 종사자로서 쌓아온 노하우들이 나의 인내력의 산물일 수도 있는데 가끔 그 인내력을 외면하기도 한다. 더 알아야한다고 더 공부할 수 있지 않냐고, 나는 누구인가?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에 대해 답하고 영성의 입장으로 볼 때 좀 더 진화한 후에 죽음을 맞이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니 최소한으로 자고 최소한으로 먹고 최소한의 조건으로 생존하면서 너는 공부를 하라 그것으로 더 나아지라고, 그 나아진 모습과 지혜로 네가 만나는 이웃에게 기여하라고 그렇게 존재하라고 혼자서도 이 작업을 꿋꿋이 해 나가라는 마음속 목소리의 격렬한 외침이 들릴 때도 있다. 또 어떨 때는 행동하기보다 혼자서 그 공부나 생각 속에서 유유히 유영하는 내가 한껏 편안할 때도 허다하다(혼자만의 시간이라는 단어조차 선물이 되어 다가온다).

이 여러 가지 문장 속에 숨어있는 불안과 두려움이 현재의 나에게서 훌쩍 떠나지는 않는다. 마치 사랑이 변신하여 나를 지켜 온 것처럼 여겨지고 같이 살아온 시간이 하도 많아서 사랑의 짝꿍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진실한 생각과 그 진실한 생각의 그림자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어떨 때는 진실한 생각에 발을 닿는 것보다 그림자에 발을 대고 있는 것이 편안하다고 생각되어 그 생각에 속을 때도 많다. 그래서 내 어른의 모습 속 아이가 좋아하는 걸 해준다. 아이가 생각 속에서 편안하게 있도록 편안하게 숨 쉬어주고, 아이가 좋아하는 스티커랑 다이어리도 사주고, 그걸 쓰는 시간도 따로 마련해 주고, 아이가 관심 있어 하는 분야의 책을 사주고 그 분야의 공부를 하는 것을 나 혼자만이라도 지지해주었다. 공부 책에 줄 쳐도 좋다고 허용하였다. 아이가 과거의 어떤 경험과 비슷한 빛깔의 경험이 다가와 불안할 때, 불안하고 힘들지? 하지만 그건 지금의 일이 아니야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야 너는 거기에서 여기까지 걸어왔어 너는 지금 안전해, 내가 지켜줄게 라고도 자주 말해주었다. 한껏 를 사랑하는 작업들이었고, 계속 나에게 해주고 싶은 나의 선물이다. ‘를 사랑하여 다른 존재들과 진실하게 연결될 때를 상상하기도 한다. 내가 삶에서 받은 선물을,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싶다. 거리가 먼 곳에서 구경하듯 떨어져서 하는 관찰보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카메라의 관찰, 존재가 가는 길을 은은한 빛으로 비추어 바라보아주는 달빛 같은 관찰을 내 눈 닿는, 마음 닿는 곳에 있는 나의 이웃들과 나누고 싶다. 여기까지 걸어온 나의 인내력에 박수를 보내며 무얼 알고자 하는 나의 호기심에 응원을 보내며, 무엇보다 지금 알고 있는 걸 유머와 열린 마음으로 나누고 싶어 하는 나를 와락 끌어안고 걷는 오늘, 올 한 해. 그런 나를 지지한다. 물론 혼자만의 공간, 혼자만의 시간을 날마다 마련해 주며.

 

다들 안 온다고 하면 우리 딸 혼자라도 오라고 그래.”라고 나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우리 딸, 이라는 말이 주는 울림을 온전히 느끼기까지 오십년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의 소요 속에 사랑이 그 자리를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의 모양이나 색깔이 바뀐 때는 수도 없이 있었겠지만,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서 빠져나간 때는 한 시도 없었을 거라고 다정히 말하고 싶다. 나에게, 그리고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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