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잔디
올해는 어쩔 수 없이 전에 다니던 성당에 두 번 다녀왔다. 두 번의 장례미사. 한 번의 악수, 한 번의 포옹. 한 번의 봉투와 한 장의 손수건. 한 번의 오열, 한 번의 흔한 눈물. 어떤 죽음은 나에게 깊은 슬픔으로 다가와 가슴이 미어져서 미사가 끝난 후 유가족을 버얼건 눈으로 마주하기가 힘들었고, 어떤 죽음은 나에게 지치고 오랜 고통과의 이별로 다가와 자유로움으로 이어져, 그저 담담히 성당 뒤켠에 서서 눈으로 검은 옷을 입은 유가족의 등을 쓰다듬을 수 있었다. 어떤 죽음은 더 이상 그를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퍼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며칠 동안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을 데리고 왔다. 어떤 죽음은 고통의 무게에 대한, 살아가는 것의 무게에 대한 생각에 빠져 너무 무겁게 존재하기보다 서로의 자유를 꿈꾸는 관계에 대한 생각을 데리고 왔다.
올해 가을, 여러 날 낙동강 문학관에 앉아 시를 읽고 시 쓰는 것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벌써 다 잊어버리고 필기한 공책을 펼쳐야 겨우 생각날까 말까 하는 기억력이지만,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생각이 난다. 한 가지는 인간은 어떠하다 그래서 인생은 어떠하다, 라고 생각하는가? 와 모든 사람이 거부할 수 없는 두 가지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었다. 연수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양한 대답을 그 공간에 내어놓았다. 시인은 오랫동안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사유를 해왔다고 말했고, 지금 자신이 갖고 있는 대답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동의하였다. 사람은 어떤 존재이며 인생은 어떠한가? 라는 질문에 대한 시인의 문장은 이것이었다. “인간은 이상하다. 그래서, 인생은 흥미롭다.” 사람이란 존재는 건강하게 이상하다 생각되기도, 건강하지 못한 면에서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하여서 나는 시인의 현재의 정의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인생은 흥미롭다.’라는 문장에 대해서는 적극 동의하였다. 내가 삶에 대해 놓치고 싶지 않고, 삶의 끝자락까지 가지고 가고 싶은 단어가 ‘호기심’이어서인지 몰라도, 오늘 어떤 일이 나에게 다가올지 모르는 상태가 과거에는 두려움이었다. 지금은 어떤 일이든 ‘드루와’의 마음으로 겪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한껏 차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기보다 일상에서 만나는 어떤 이슈나 이벤트를 내가 ‘어떻게’ 겪고 있는지 구경하는 마음이 조금 생겼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느끼는 것이 ‘기쁨이나 사랑스러움’이 아니더라고 ‘고통’을 동반한 불편한 느낌을 데리고 왔더라도 이 존재의 생각과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자, 라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는 구경꾼이 가진 흥미로운 마음으로 볼 때도 있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인간은 나무이다. 그래서, 인생은 사계절”이라고 누군가 말했던 정의도 생각이 나고, 이 정의에도 마음이 간다.
또 다른 질문, 지구가 두 쪽이 나도 모든 사람이 거부할 수 없는 두 가지는 무엇인가?에 대한 시인의 현재 대답은 이것이었다. 어떤 상황이 되어도 거부할 수 없는 두 가지는 죽음이라는 짧고 작은 부분을 포함한 ‘시간’과 지나간 다음에 알게 되는 ‘우연’. 죽음은 거부할 수가 없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원래 우리는 없던 존재였다가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있어졌다가 다시 없어지는 존재이기에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인연, 필연, 우연 중에 우연은 지나간 다음에 알게 되는 것. 시라는 장르 역시 우연의 장르라고 설명하였다. 삶이라는 것이 내가 아는 것을 상대들에게, 자신에게 가르치는 것이라기보다 모르는 걸 서로 같이 알려고 하는 그 과정 자체이기에 흥미롭지 않은가라고도 말하였다. 시인은 시가 가진 세가지를 가지고도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그 세가지는 이상한 것, 중요한 것,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시를 읽고 쓰는데 있어서 이상한 쪽으로, 중요한 쪽으로, 아름다운 쪽으로도 쓸 수 있는데 나 자신은 무엇을 쓰고 싶은지, 내가 가진 걸 간절하게 나의 글이 나의 간절함을 거쳐 내 목소리로 나오도록 풀어가는 것이 시가 아니겠냐고, 그것이 삶이 아니겠냐고 그것이 나의 시에, 나의 인생에 사랑을 담는 방법이 아니겠냐고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내 삶을 생각하는 시간을 아무리 바쁘더라도 ‘5분’ 정도는 사유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를 추천하였다.
다시, 두 번의 장례미사와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을 들여다본다. 나의 시간에 대한 생각을 들여다본다. 발끝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쳐다보면서도 그것이 춤이라고 생각하며 피를 흘리며 추었던 춤을 이제 그만 멈추고, 나를 위한 유쾌하고 가벼운 춤을 추기를, 새로운 춤추기를 바라보고 싶은 내가 가을 감나무 앞에 서 있다. 어떤 박자와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고 싶은지 묻는 내가 거기에 있다. 너의 마음속에 이미 너를 위한 춤이 거기에 있었다고 말해 주는 내가 거기에 있다. 감나무 꼭대기에 켜있던 전구를 까치가 콕콕 찔러 꺼버린 순간, 나를 위해 오렌지빛 전구를 다시 켜는 내가 거기에 있다. 허리가 굽었어도 굽은 상태로 출 수 있는 춤을 추는 할머니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진 내가 여기에 있다. 나는 나답게 살았다,라고 숨의 마지막 순간에 나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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