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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줄을 친다는 것

by 인권연대 숨 2024. 9. 26.
줄을 친다는 것

잔디

 

작렬하던 매미 소리는 다 어디로 사라져 갔을까? 뜨거운 햇살과 함께 사라져 매미 소리가 툭 끊겼다. 연이틀 내린 비로 갑자기 성큼 큰 걸음으로 방충망을 뚫고 가을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바람이야 어떻게 어떻게 통과할 수 있다지만 가을은 어떻게 이 안으로 발자국을 옮긴 것인지. 신비롭기까지 하다.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방바닥을 따뜻하게 데웠다. 난방 온도를 실내 온도보다 높게 설정!

 

내가 만약 이 공간에서 홀연히 여행을 떠난다면 챙기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제일 처음에도 제일 나중에도 떠오른 것은 ’. 살면서 우연히 아가야를 쳐다볼 기회가 올 때 심장이 먼저 뛰었지만, 꽃 그려진 접시보다 은은한 빛깔의 머그잔보다 빨간 스웨터보다 아기자기한 스티커보다 처음 물에 둥둥 떠서 별빛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정말 마음에 드는 향기의 커피보다 더 지금도 여전히 심장을 빨리 뛰게 하는 것은 책! !! !!! 책을 읽으면서 힘들고 어렵고 고독한 육아의 밤을 위로받았다. 책을 읽으면서 혼자만의 밤을 무수히 자유로운 상상으로 보냈다. 책을 읽으면서 살아갈 날의 사소한 꿈을 키웠다. 책을 읽으면서 어두워진 마음에 다시 불을 밝혔다. 책을 읽으면서 짙은 고독 속에서도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연결된 연결감을 맛보았다. 책을 읽으면서 지금의 고통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 배우고 새로운 시선을 회복했다. 책을 읽으면서……

 

봄이 저~기에서 걸어오고 있을 때 시린 손을 비비며 이사하면서 가족들의 원성을 들으면서도 버리지 못한 한 가지. . 그림책, 시집, 동시집, 아끼는 작가들의 소설책, 그 무엇보다 생각에 관한 것이거나 대화에 관한 것이어서 결국 사람에 관한 공부책들이 대부분이다. 그 책들을 내가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식구들 중 누군가 나중에 읽는다면 깨끗한 상태에서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또 식구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원한다면 선물할 수도 있으니 깨끗하게만 보려고 노력했던 나를 문득 보았다. 그리고 간혹 책꽂이 꽂힌 책을 참고도서로 잠시 읽기도 하는 식구가 있기는 하지만, 이 책들은 나의 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보고 싶은 방식으로 책을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왔고, 줄을 그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부터 나는 마치 줄을 긋는 것이 책 읽는 것과 동일한 느낌적인 느낌으로 줄을 치기 위해 사는 거미처럼 색색의 줄을 친다. 그날의 책읽기를 시작하기 전에 마음에 드는 색연필을 최소 3가지 정도 선택하고, 책 옆에 그것을 두고 색연필을 책읽기 도구삼아 책을 읽는다. 물론 책읽기가 끝나면 그날의 날짜와 그날 책읽기를 하면 나에게 찾아온 문장, 단어를 작은 글씨로 적거나 줄 친 문장 중에 더 와닿은 문장을 짧게 적는다. 한 번 더 읽어보고 싶은 페이지에 접착 띠지를 붙이거나 생각이 길어질 때에는 접착 메모지에 나의 생각을 적어 해당 페이지에 붙이기도 한다. 책꽂이에 꽂힌 책들에 내 흔적을 남기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읽기를 멈추었던 책을 갑자기 꺼내 그 자리에 앉아 읽다가 저런 행동을 하기도 한다.

한 번에 한 권 읽기를 추구했던 나는 지금 한 번에 여러 권 읽기를 시도한다. 언젠가 40권씩 책을 업고 메고 들고 이동하며 읽던 어떤 분이 출연하는 화면을 보고 시도해보아야지 했었던 거사(?)를 진행중이다. 읽기 시작한 책을 서둘러 끝까지 빨리 읽으라고 밤을 새면서까지 나를 종용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책 속에서 부드럽게 유영하는 듯한 느낌. 이 읽기 방식이 깊이 읽는 방식인지 알 수 없어 아직 실험중이지만, 이 책도 읽고 싶고 저 책도 읽고 싶은 지금의 나에게 적합한 방식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동시 읽기와 쓰기 강의를 집중적으로 2년 정도 듣고 나니 혼자 서도 동시를 읽는 방법을 조금 터득한 것 같다. 지난 학기에 들었던 시인의 동시집을 책꽂이에서 뽑아 나름의 분석과 느낌을 적으며 공부한 걸 시 한 편 한 편마다 붙여놓은 메모를 읽었다. 그때의 나는 이렇게 읽었구나, 하며 지금의 내가 다시 메모를 붙인다. 나란히. 아직 갈 길은 멀지만, 나름 터득한 것을 바탕으로 붙여가는 메모가 시집을 조금씩 두텁게 만든다. 시만 쓰던 한 시인은 동시를 쓰기 위해 먼저 출간된 동시집 한 권을 400번 읽었다던데. 그이를 따라 하려는 것이 아니라(그이를 따라 할 수가 없다. 그저 눈물이 흘러 자꾸 닦아내어야하는 몸이 될 때까지 시를 써온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는 있겠다. 아니, 시늉은 할 수 있겠다. 나의 모습으로.) 색연필통에서 어떤 색연필이 줄이 잘 그어지는지 선택하여 원하는 문장에 줄 치면서 작은 메모지를 붙이면서 하는 공부가 나를 즐겁게 한다. 즐거운 나를 보는 것이 즐겁다. 누가 아는가 이렇게 줄을 치다 보면 튼실하고 유쾌한 동시 한 마리 덥석 나에게 안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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