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처럼
잔디
‘수치심과 1일’과 이후 하나의 버릇이 생겼다. 내 마음에 ‘수치심 나침반’이란 걸 장착하고 사람들을 보는 버릇. 나를 포함하여, 아니 나를 제일 앞자리에 두고. ‘수치심의 나침반’은 우리가 수치심을 느끼는(당사자가 감각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어떤 상황 속에서 우리가 에너지를 쓰는 네 방향이 있다라고 가정한다. 어쩔 수 없이 네 가지 방향 중에 한 꼭짓점에 가서 서있는 경우, 그 꼭짓점에 서서 파생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생각들이 우리를 온전하게 존재하는 상태를 깨뜨린다라고 본다. 우리는 원래 나침반의 중앙에 그려진 커다란 NEEDS(사람들이 품고 있는 보편적인 욕구-사랑하기를 사랑받기를 바라는 마음, 내 존재가 수용되기를 다른 존재를 수용하기를 바라는 마음, 내 존엄을 공동체 안에서 존중받기를, 존중하기를 원하는 마음 등등)의 동그라미 안에 존재해 있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 자극이 왔을 때 우리의 생각은 내 잘못, 네 잘못, 반항, 후퇴 네 가지의 방향 중 한 방향으로 흐른다(혹은 멈춘다). 자기 비난하는 ‘내 잘못’의 장소에 서서 “그건 내 잘못이야.”라고 생각하며 나 자신을 망가트린다. 상대 비난이라는 ‘네 잘못’의 장소에 서서 “그건 네 잘못이야.”라고 생각하며 생각 속에서 혹은 행동으로 상대를 공격한다. 반항의 장소에서는 “나는 이 상황을 바꿀 힘을 가지고 있어.”라고 생각하며 힘을 휘두른다. 후퇴라는 장소에서는 “나는 이 상황을 바꿀 힘이 없어.”라고 자신에게 말하며 자신을 축소시키고 숨어버린다.
내가 주로 거닐었던 장소는 ‘내 잘못’이나 ‘후퇴’였다는 걸 이제 안다. 물론 상대를 비난하는 생각이나 반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혹은 반갑지 않은, 굳이 반복해서 겪고 싶지 않은 어떤 상황이 내 앞에 펼쳐졌을 때, 내가 가는 첫 장소는 “내가 뭔가 부족해서 이런 일이 또 일어났구나”‘, “내가 뭘 잘못해서 이걸 겪어어야 하지?”이다. 내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되짚어가는 첫 생각이다. 내가 그때 그걸 했더라면 이 상황은 지금보다 더 좋았을 거야.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내가 조금 더 책을 읽고 공부해서 열심히 살면 이상황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야. 불완전한 나를 나아지게 해서 내가 겪는 것을 어떻게든 바꾸어 볼거야 등등 생각을 기록해보니 점점 ’후퇴‘의 장소에 서 있었다고 생각했던 지점에서 내가 반항했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을 바꿀 힘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여겼는데 나는 억지로 어떻게든 나를 개선해서 상황을 바꾸려고 했거나, 바꿀 수 있다고 ‘오만’을 발휘하고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도와달라고 요청하기도 하면 좋았을 상황에서도 나는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다. 홀로 외로이 ‘내 잘못’이라고 여기는 장소에 서서 빙빙 도는 생각들을 하며 애쓴 내가 그 장소에서 그리웠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잠시 그 마음을 찾아본다.
내가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냥 들어줄 사람(침묵 공감), 어떤 상황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내려고 존재하려고 했던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온전함, 존재감), 왜 도와달라고 말하지 못했는가라는 말보다 거절이 두려워 손 내밀지 못한 나에 대한 이해(연민). 찾은 마음(NEEDS)을 가만히 안고 나침반에 그려진 NEEDS의 자리로 돌아와 누군가 침묵으로 내 존재를 같이 느껴주며 온전히 나를 들어주는 상상을 해본다. 그 상상을 할 때 내 몸이 느끼는 변화를 가만히 느껴본다. 눈물이 흐를 때도. 드디어 찾은 마음이 기뻐서 홀가분 해 질 때도 있다. 지금에 와서 흐르는 눈물은 가슴이 찢어지거나 하는 커다랗고 깊은 눈물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나에 대한 나의 연민. 그래서 그눈물에 빠져 있기보다 나의 눈물을 내가 닦아주고, 내가 나를 위해 흘린 눈물에서 다시 기운을 찾는 의미로써의 눈물이다.
‘수치심과 1일’이후 자신의 이야기를 나와 나누기 위해 함께 사용해보는 리브 라르손의 수치심의 나침반이 있다.
이 나침반을 받았을 때, 그 어느 장소보다 내가 서거나 앉거나 주저앉아 울거나 할 수 있는 장소가 이 나침반의 가운데 위치해 있는 NEEDS의 자리라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지금 네 방향 중 어느 자리에 갔다가도 그 장소에서 내가 진실로 원하고 바라고 희망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읽고 다시, 동그라미 안으로 들어와 나를 돌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이 나침반을 내 마음에 가지고 다른 사람의 힘든 마음을 함께 돌볼 수 있음에도 감사한다.
수치심은 날마다 찾아오고, 벗겨내어도 벗겨내어도 반복되는 양파속살처럼 계속 만나다 보면, 그 안에 무엇이 있을까하는 호기심으로 다가가다 보면 여리지만 말랑말랑하고 아삭아삭한 그래서 씹는 재미가 있는 속내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밖을 바꾸려는 공부보다 나를 보살피고 그 치유된 친절한 내면으로 세상과 연결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어디로 떠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온전한 나를 만나고 싶은 것이다. 순간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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