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추밭
잔디
지금의 나는 그저 시골사람이지만,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의 삶을 처음 시작했던 이십여 년 전 그때, 내 마음에 들어와 충만한 에너지로 채워주는 두 가지 풍경이 있었다. 집에서 나와 어쩔 수 없이 매일 오가며 마주칠 수밖에 없었던 부추밭과, 모내기를 하기 전 물로 채워진 무논이었다.
허리를 몇 백 번 폈다 접었다 하며 논흙 한 삽 한 삽 떠서, 구멍 난 곳을 채우고 울퉁불퉁한 면은 고르게 흙을 발라놓은 논두렁. 매우 정갈한 도자기 작품처럼 구부러진 논두렁을 매끈한 곡선으로 만드시는 어르신의 작업과 작품을 봄이면 볼 수 있어서, 물로만 채워진 그 논을 밤에 몰래 가서 한참 바라보던 때가 있었다. 그 논이 있는 마을에 지금은 살지않지만, 지금도 여전히 오가며 모내기철에 바다처럼 빈 논과 논 옆에 서서 익어가는 오디를 본다. 논이 채워지지 않고 그저 저렇게 텅 비어 있다면 나의 내면도 저러할텐데라는 걸 매일 일깨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럼 밥은 어찌 해먹누 하며 피식 웃곤 한다.
부추밭은 해마다 소망처럼 남아있는 숙제였다. 동네 어머님들 부추밭의 부추는 겨울을 지나도 장마가 지나가도 여전히 부추밭에서 자라는 부추로 남아 있었다. 잘 자라고 있던 초록이 어느 샌가 싹둑 잘라져 오늘 메뉴는 부추전이거나 부추된장국이거나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리고 나의 부추밭은 왜 늘 실패로 끝나는 것인가 자책을 하기도 여러 번. 길쭉길쭉하게 자라나는 파와 부추. 그 초록이 바람에 넘실넘실 춤을 출 때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 풍경을 나의 시선 앞에 두고 싶었다. 이 밭 저 밭에서 부추를 얻어다 빈 땅에 심고, 하루 이틀 잘 자라나 보며 작은 풀을 뽑아주며 가꾸다가 어느새 부추를 잊고 장마를 지나보면 부추와 풀을 구별해낼 수 없어서 축 처진 마음으로 나는 안 되는구나 하며 돌아서곤 했다. 그렇게 여름 지나 가을, 겨울을 지나면 빈 땅처럼 보이는 그곳에서 부추 싹이 자라고, 가꾸지 않아도 잊고 있어도 자라난 녀석이 고맙고 신기해서 또 작은 풀을 뽑아주며 보살피다 잘 자란 걸 보고 즐기다 한 번 잘라내어 먹고는 또 잊고, 그러다 몇 해를 반복하다보면 부추는 주변의 풀에 잠식당하고, 손바닥만한 부추밭 하나 보살피지 못한 나를 또 자책하고 그렇게 되풀이하며 여기까지 왔다.
지금 나의 부추밭은 주방 창과 마주 서서, 매일 고개만 들면 볼 수 있는 곳에 있다. 부추가 제일 뒤에 그 앞에는 실파였던 대파(대파라고 하기엔 아직 어린 중파...), 그 앞엔 남편이 심은 여러 가지의 쌈 채소, 그리고 그 앞엔 한련화 세 포기, 그 옆엔 고추 몇 포기와 토마토 몇 포기가 자라고 있다. 이 봄에 역시, 부추와 부추 사이엔 난 작은 풀을 뽑다가 허리 통증이 시작된 한 달 여 전쯤부터는 풀 뽑기를 할 수가 없어서 바라보고만 있었더니 부추보다 풀의 키가 커져서 “뽑아야 하는데 뽑아야 하는데” 하다가 오늘 아침엔 좀 일찍 눈을 뜨고, 허리 통증도 좀 감소하여 이십 분 정도 풀을 뽑았다. 부추보다 키가 큰 풀도 많았지만, 이제 막 싹을 틔운 토마토 싹이며 이름 모를 풀의 작은 싹, 땅에 딱 붙어 세력을 넓히고 있는 풀도 있었다. 긴 풀은 맨손으로 잡아당기고 땅에 달라붙어 있는 풀은 긁거나 손가락을 한껏 구부려 힘주어 잡아당기고, 잘못하여 부추도 뽑거나 끊기도 하였다. 뽑은 풀은 부추와 부추 사이 빈 땅에 이불처럼 덮어주었다. 거름이 되어 한낮 부추의 그늘이 되어주면 좋겠다.
혼자 난리법석을 떨다가 식구들 아침상 차리러 들어와 다시 부추 밭을 바라보았다. 긴 풀로 꽉 차 있는 것처럼 보이던 밭이 좀 헐거워져서 허전해보이기도 하였지만, 여유로와 보이기도 하고, 목적에 합당한 밭처럼 여겨지기도 하였다. 아직 풀을 뽑지 못한 부분도 있어서 그곳이 신경 쓰이기도 하였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풀을 뽑기 전보다는 정갈해진 밭을 보며 잠시 홀가분해진 마음과 시간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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