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엄마는
잔디
# 월, 화, 수, 목, 금요일 아침마다 동시집 읽기 대화방에 그날의 시제가 게시된다. 동시집 읽기 강좌를 시작하는 첫 날, 강사님은 수강생 한 명 한 명에게 네 가지의 단어를 제시해 달라고 부탁하였고, 수강생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재미있는 듯 각각 네 가지 단어를 말하였다. 강사님은 곧 단어를 쪽지 한 장에 하나하나 써서 단어주머니를 만들었고, 아침마다 단어주머니에서 단어 하나를 뽑아 그날의 시제로 선물한다. 아침에 시제를 받으면, 그날 밤 9시까지 어떻게든 글 하나를 완성하여(주로 동시 형식) 다시 단체 대화방에 게시한다. 이름 하여 “9글”. 이 강의를 듣고자 선택할 때 9글이 뭘까? 궁금했던 우리는 강사님이 9글을 설명했을 때, 좌절하기도 희망하기도 했다. 날마다 시 한 편을 어떻게 써내냐, 강의 듣는 두 달 동안 이런 경험을 해 보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경험일 것 같다, 이런 강의인 줄 몰랐다, 등등의 반응이었으나, 수강생들은 날마다 엄마 닭이 알을 낳듯 어떻게든 시라는 걸 낳고 있다. 가끔 10글을 하거나 11글을 하거나 01글을 하기도 하지만, 당황스러운 새로운 제안 앞에서 밥상을 차려서 나와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듯 월, 화, 수, 목, 금요일 동안 매일 다른 반찬을 만들어 먹고 있다.
# 매일 새로운 시를 짓는다는 건 작가의 삶, 시인의 삶을 꿈꾸고 한 발짝씩 그 길을 걸어보려 어떤 날에는 희망하기만 하는 나이지만 쉽지 않다. 어느 날 아침엔 시제를 받자마자 3분 안에 써놓고 별다른 퇴고도 없이 제출하기도 하지만, 어느 날엔 하루 종일 고민만 하고 별다른 글이 나오지 않아 시제가 “얼음 공기”였던 어제는 〈놀이는 계속되어야 해〉라는 제목으로 “얼음, 땡!/ 민재야, 이제 공기놀이 하자!” 이렇게 두 문장짜리 글을 하루 종일 서성이다 9시에 제출했다. 제출할 때까지 “아, 이렇게 제출해도 되는 걸까? 차라리 제출하지 않는 게 낫겠어.”, “그냥 제출해.”, 이런저런 생각들과 줄다리기를 한참 했었다.
# 그리고 퇴고를 몸으로 느꼈다.
오늘 점심 때
태어나서 43년 동안 말하지 않고
살아온 언니랑 마주 앉아 급식을 먹었어
언니랑 손잡고 다니는 옆에 앉은 언니가 말해 주었어
43년 동안 말하지 못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언니에게 엄마가 있다면
언니는 엄마한테 "엄마"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언니의 어머니는 언니한테
"엄마"라는 말을 듣고 싶었을까?
말하고 싶을 것 같아
듣고 싶을 것 같아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한 알 한 알 밥만 먹었어
언니와 그 언니는
벌써 급식을 다 먹고 물을 마시고 있었어
나는 복지관 3층으로
일하러 올라가는 두 언니의 뒷모습을
그냥 보기만 했어
우린 내일도 마주 앉아 밥을 먹겠지
등지고 앉아 밥을 수도 있겠지
만나지 못하면 따로따로 밥을 먹을 수도 있겠지 운이 좋으면 또 마주 앉겠지
나는 언니를 가끔 떠올릴 것 같아
말하지 못한다는 건 어떤 걸까? 묻기도 하면서
소리 내지 않는 삶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 하기도 하면서
이랬던 이 글을 아래처럼 퇴고해 보았다.
오늘 엄마가 점심 때
태어나서 30년 동안 말하지 못하고
살아온 이모랑 처음 만나 밥을 먹었대
30년 동안 말하지 못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이모가 하고 싶었던 말은 뭘까?
이모가 듣고 싶었던 말은 뭘까?
만약 내가 이모라면?
생각하면서 밥을 먹었어
그냥 서로 보기만 하며
밥 먹는 두 사람
엄마는
이모를 가끔 생각할 것 같아라고 말했어
나도 가끔
이모를 떠올릴 것 같아
그리고
말한다는 것에 대해
이글을 옮겨 적는 지금 말한다는 것에 대해, 침묵에 대해, 공명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또 등단하기를 희망하면서 신춘에도 그 어느 잡지에도 원고를 제출하지 않고, 희망하기만 했던 나를 생각해 본다.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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