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언제일까요?
잔디
토요일 아침, 여유로운 잠에 빠져 있을 때 꿈속에서 자꾸 119 차 소리가 들린다. 아, 누군가를 구하러 나는 진정 일어나야만 하는가? 꿈결에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덧 몸은 이것은 꿈이 아니라 실제로 마당에서 들리는 소리라는 걸 알고 벌써 창문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 아, 할머니……. 뒷집 할머니에게로 달려가 보니, 할머니는 주방 바닥에 누워 계시고, 구급대원 두 분이 할머니 좌우에서 제세동기를 가동시키며 분주히 할머니를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단 할머니집 마당으로 구급차를 안내하고,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은 할머니에게로 향해 있다.
어젯밤 감나무 아래에 앉아 딸과 노래 부르며 대화하며 놀다 쳐다본 할머니집 불빛은 10시 30분까지 켜져 있는 걸 보았는데, 오늘은 늦게까지 불을 쓰시는구나라고만 생각하고는 우리는 집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
할머니는 걸레를 손빨래해서 널고 욕실에 들어가셨다가 밤새 욕실 바닥에 엎드려 계셨나보다. 누워서 숨 쉬는 것처럼 혹은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할머니를 살리려는 119대원님을 바라보며 두 손 모으고 바라보며 있는데 보호사선생님은 저번에도 이런 일이 있어서 당황했었는데 오늘 또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 할머니가 힘든 일을 겪으셨다니 많이 죄송하기도 하고, 한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할머니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덥기도 하고 시간이 빠듯하게 흐르기도 하고, 뭔가 알 수 없는 무기력에 빠져서 시간이 흐르기도 하여서 할머니집 불빛만 바라보았지 정작 할머니 가까이에 있지는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올라와 더 간절히 ‘할머니의 숨’을 바라며 한참을 서 있었다. 어느 순간 할머니에게 숨이 돌아왔고, 할머니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보호사 선생님도 구급차를 따라 떠나셨다. 할머니의 주방에 남아있는 구급대원님의 발자국을 닦고, 걸레를 빨아 널고, 할머니 방에 켜져 있는 에어컨을 끄고, 문단속을 하고 놀란 가슴을 쓸어 주고, 하니 밥도 조금 가져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였다. 어떤 일을 만났을 때 잘하지 못한 후회보다, 그 후회가 몰고 오는 나에게로 향하는 비난보다, 더 큰마음으로 나를 만나는 때, 그때는 언제일까?
저녁에 할머니집 마당에 세 대의 차가 빼곡하게 주차되었다. 심은이 언니 말로는 할머니가 저녁에 드시는 약을 1봉지만 드셔야하는데 약 복용하신 기억을 잃고 3봉지를 드셔서 지금 중환자실에서 잘 주무시고 계시고 내일이나 모레 집에 오신다고 걱정말고 밥 잘 먹고 있으라고. 오며 가며 엄마한테 신경써 주어서 고맙다고. (불빛만 쳐다보았지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할머니는 며칠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고, 나는 복숭아 몇 알 들고 가서 할머니와 손잡을 수 있었다. 할머니 만나서 좋다고 감사하다고 말하고 얇은 꽃무늬 셔츠를 입고 계신 할머니가 찬이 언니랑 대화 나누시는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내려왔다. 할머니가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돌아오셨을 때처럼 자녀분들이 돌아가며 할머니를 보살폈다.
바람 부는 주말 오후, 이번 주 주말 당번은 큰아들 아저씨, 마당에 까만 승용차가 주차되어있다. 할머니가 할머니 전용차를 밀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오신다. 그 어느 때보다 초록 고추를 많이 키운 고추나무에서 고추를 따서 아주 오랜만에 고추장아찌를 만들어 볼까하며 고추를 하나하나 따서 바구니에 담고 있는 나와 할머니가 눈이 마주친다. 언젠가 나처럼 고추를 따던 할머니의 손에 두유 하나. 지금 고추를 따는 나의 손에도 두유 하나. 두유 하나 마실 동안 서로 바라보다가 할머니는 할머니의 길로, 나는 나의 자리로 돌아온다.
감꽃이 그렇게 떨어지고, 초록 감이 그렇게 떨어졌는데도 감나무에 주홍불이 다닥다닥 켜져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불이 땅위로 툭하고 떨어진다. 운 좋게 깨지지 않은 불을 만날 때 나는 그것을 내 입으로 넣어준다. 아직 마음이 환해졌는지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땅위로 내려앉은 불을 반가운 마음으로 달려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살피는 것을 보면, 내 마음속의 불씨가 영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면 된 거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은 가을. 자주 시린 목을 감싸주는 목도리를 살짝 둘러도 좋은 이 계절을 다시, 사랑할 마음을 아주 조금이라도 갖고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라고 나에게 말해준다. 이제는 그때는 언제일까요? 라고 묻지 않아도 된다고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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