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프 미’ 스물아홉 번째 책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著, 다산책방 刊, 2023
사소한 관심과 연민, 변화의 씨앗 – 이구원
이 책의 주인공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가족들과 함께 맞이할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던 중 종교 권력의 시설폭력을 마주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외면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소녀를 원장 수녀에게 돌려보내며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려 한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과 자신 역시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돌봄에 의해 살아왔음을 자각한 후 폭력의 현장으로 돌아가 그녀를 데리고 나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개인적 경험에 의하면 종교적 폭력과 시설의 폐해는 새롭지 않다. 사실 여전히 대한민국의 수많은 거주시설에서는 보호와 복지란 명목 하에 인권 침해가 교묘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장애인의 경우 한 사람으로써 자기 결정과 선택은 무시한 채 대충 잘 먹이고 숨만 잘 쉬며 살면 된다는 인식이 존재하기에 시설을 없애기란 매우 어렵다. 이러한 현실 때문인지 얇은 이 책이 무겁고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에서 주인공이 내린 결정은 수많은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이 책에서 한 사람의 개인적 구제가 종교권력과 시설의 구조적 저항에까지 이르는가에 대해서는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사람에 대한 사소한 관심과 연민이 따뜻한 연대와 어떤 변화의 씨앗이 될 수 있음에 작은 희망을 느낀다.
이처럼 사소한, 아름다운! 것들 – 배상철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 번역자 홍한별님은 특별히 이 책을 두 번 이상 읽어 보라고 당부했다. 홍한별님의 당부대로 이 책을 두 번 읽고 난 후, 마치 진한 여운이 남는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한 느낌 그대로 서평을 남긴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쳐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120p)
많은 사람이 미시즈 윌슨처럼 ‘친절’,‘격려’,‘사소한 것’들이 합해진 하나의 삶을 살고자 하는 펄롱의 모습과 태도에 일말의 평가라도 남기고 싶을 것 같다.
1985년 아일랜드의 평범한 소시민 펄롱은 자신도 풍족한 삶을 살지 못하면서 주위에 상황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 그의 아내 아일린은 그런 그의 모습에 공감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 그런 그의 삶을 못내 서운해했다. 그리고 펄롱을 아는 많은 사람의 펄롱을 위로하고 걱정하는 듯한 말투 속에는 아일린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말했듯이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그 수녀들이 안 껴 있는 데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거기 일에 관해 말할 때는 조심해야 하는 편이 좋다는 거 알지? 적을 가까이 두라고들 하지. 사나운 개를 곁에 두면 순한 개가 물지 않는다고. 잘 알겠지만.’ (105p)
어느 날 마을 언덕 위 수녀원에서 학대받고 감금당한 소녀의 탈출 요청을 외면한 후 괴로워하며 갈등하는 펄롱에게 위로하듯이 건넨 단골 카페 주인의 말처럼.....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소설 속 주인공 펄롱의 ‘돕는다는 삶’을 둘러싼 관계와 다양한 갈등과 도전 그리고 그 속에서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펄롱의 ‘돕는 삶’은 오갈 데 없는 어머니를 받아주고 정성스럽게 돌봐준 미시즈 윌슨의 영향이 제일 크다. 빌 펄롱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미시즈 윌슨의 돌봄을 받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막달레나 세탁소에 감금당하고 학대받는 소녀들의 삶과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빌 펄롱에게 미시즈 윌슨의 ‘돕는 삶’은 단순한 돌봄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만약 빌 펄롱에게 ‘돕는 삶’이 단순한 돌봄 정도라 하면 펄롱과 그의 아내, 다섯 딸 아이에 대한 세세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원장 수녀의 ‘쓸데없는 일에 개입하지 마라’는 은근한 협박에 못 이기는 척 순응했을 것이다. 수녀원에서 학대받는 한 소녀를 구출하여 지나치며 만나는 마을 사람들의 외면과 회피와 수군거림 앞에 몸 둘 바를 몰랐을 것이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119p)
그러므로 펄롱의 ‘돕는 삶’은 불의에 대한 저항이다. 거대한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용기이고, 가슴 속에서 용솟음치는 거대한 기쁨이었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을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121p)
소설의 끝은 아일랜드 모자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감금, 폭행, 성폭력, 정서적 학대, 강제 노역에 시달렸던 어린 여성의 고통보다 더한 최악은 없을 것이며, 앞으로도 최악에 저항하는 올바른 삶을 살아야겠다는 각오로 마무리한다.
돌봄과 돌봄이 이어져 왔을 마음을 기억하고 전달하고 싶다. - 이재헌
클레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으며 내가 제일 많이 든 감정은 부끄러움이다. 내가 일상을 살아가며 맞닥뜨렸던 크든 작든 도움이 필요했던 이들이 있다. 대부분은 그들을 외면했었다.
‘별일 없겠지…’
어느덧 나는 우리 사회가 불평등과 차별이 만연한 곳임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간절히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내 곁에 가까이 있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 대상이 사람뿐만 아니라 나무나 숲일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면 내가 주로 듣던 말은 빌 펄롱이 들었던 그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 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당신은 너무 속이 물러….(중략)…. 당신이 모르는 거 같아서. 당신은 딱히 어려움을 모르고 컸잖아.”
처음에는 이런 말에 침묵했고 내가 현실적이지 못한지 돌이켜 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그 말의 비겁함에 불편하거나 분노했다. 그러나 내가 빌 펄롱처럼 용기를 낸 기억은 별로 없다. 그나마 작은 광장에서 잘못됐다고 지적은 해본다. 그 상황에서조차 두려움이 크고 한 발짝 더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부끄럽다.
저자는 용기가 부족한 나에게 담담하게 말을 던진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이미 지나갔다.”
빌 펄롱과 그의 어머니에게 미시즈 윌슨과 네드가 있었듯, 빌 펄롱의 어머니와 이름이 같은 세라에게 빌 펄롱이 손을 내밀었듯, 우리는 서로에게 돌봄을 내어주고 내어 받으며 살아간다. 점점 더 서로를 혐오하는 소리가 커져가는 지금, 돌봄과 돌봄이 이어져 왔을 마음을 기억하고 전달하고 싶다. 그 순간의 기쁨을 공유하고 싶다.
사회공동체에 의지혀서 살아갈 수 있어야 – 나순결
일상. 사소허다 지루허구 허지만. 시간은 쏜살 맹키루 흘러간다. 감내허기에 충분헌 속도루 지나간다.
외면허구 잡은 현상계는 쌓이구 쌓여 있다. 어느 거이 먼첨 물구 늘어질건가? 무논 자신 주변, 너내우리가 처헌 작금 여기 일 밖에.
'막달레나 세탁소' 와 '모자 보호소'. 천벌 받을 카돌릭교회와 행정가들. 여성과 아이들이 만명인지 3만명인지가 죽어나갔다. 17년도에 총리 사과가 있었다. 사과헌다구 죽은 이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살아남은 이들두 그저 '아~ 안타까운 일이 있었네~' 그러구는 끝?!
'집단감금시설'을 없애 나가야 헌다. 최소한으루 운영혀야된다. 그럼 어찌허냐구?
최소한이라 혔다. 그룹홈이 해결책. 돌봄이 필요헌 이 10인 미만과 그들을 돌볼 이 10인 미만이 항꾼에 가족을 이뤄 생활•경제공동체루 일상을 영위허는 것. 가까운 곳에 미래가 있다. 니혼 혼슈 도시 그 어디에서나 기능허구 있는 그룹홈들!!!
사회약자가 시설에 감금되지 않구, 사회 공동체에 의지혀서 살아갈 수 있게 혀주어야 헌다. 그거이 아픔을 줄이구 고통두 줄이구 더우기 사회비용-너내우리가 낸 세금두 적확허게 사용허게 허는 방법이기에.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사람이 생기면 - 이은규
나는 어릴 적 두 번의 버려짐을 잊지 못한다. (두 번 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에게 다가왔던 사람을 잊지 못한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버려졌었고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에 의해 구조되어 생존했다. 그래서일까 버려진 사람들의 마음을 본다. ‘사람이 없는 사람’을 본다.
당해봐서 겪어봐서 안다. 당장에 현실적 도움을 받을 수 없어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기운이 돌고 체온이 따뜻해진다는 것을, 말 한마디 건네는 것이 아주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는 것을 안다. 내 곁에 사람이 있음에 안도한다.
나는 ‘타인들이 보여준 친절을, 그들이 어떻게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로 인해 살아가고 있음을’ 안다.
울고 있는 사람이 있어도 보지 않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어도 응답이 없는 세계를 산다는 것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자신을 살아 있는 존재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사람이 없는 사람이다.
빌 펄롱은 어머니와 함께 미시즈 윌슨의 집에 얹혀 살았다.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갑자기 죽은 후에도 펄롱은 성년이 되어 독립할 때까지 미시즈 윌슨의 돌봄을 받았다. 펄롱은 결혼하고 다섯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그렇게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으며 남들이 다들 살아가는 대로 살 수 있었다.
어느 날 마을 수도원에서 학대받고 감금당한 소녀를 본 후 괴로워하며 갈등하는 그에게 단골 카페 주인이 말했다.
“말했듯이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그 수녀들이 안 껴 있는 데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해.”
“그 사람들이 갖는 힘은 딱 우리가 주는 만큼 아닌가요?”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냐.”
미시즈 케호는 말을 멈추고도 극도로 현실적인 여자가 가끔 남자들을 볼 때 짓는 표정, 철없는 어린애 보듯 하는 표정을 지었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에 펄롱은 마침내 수도원에 감금당한 소녀를 데리고 나온다. 그 순간에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떠올렸다.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펄롱의 곁에는 미시즈 윌슨, 사람이 있었다.
사회심리학적으로 국가와 대중이 인권침해를 부인하거나 외면하는 유형과 상황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스탠리 코언은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에서 여러 사례를 통해 부인을 극복하고 시인을 통해 감추어진 진실과 인권침해 피해자들을 구조할 수 있다는 ‘믿음’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있다.
코언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인간의 양성을 성취하기 위한 교육이 인권운동의 최우선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육은 따로 형식과 내용을 구성하지 않아도 된다. 먼저 산 사람이 나중에 온 사람에게 삶으로 보여주면 된다. 숨 쉬듯 자연스레 억지랄 것 없는 ‘사소한 것들’의 삶으로.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사람이 없던 ‘감금당한 소녀’에게 사람, 빌 펄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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