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
하기정
죽은 다음에야 이름이 불리는 여자들이
가랑이 사이 대바구니를 끼고 나물을 뜯는다
고모 이모 숙모 당숙모 시모 친모 온갖 어미들이
할머니 외할머니 큰할머니 왕할머니 온갖 할미들이
지붕 위에 흰 저고리 던져놓고
붕붕붕 박각시나방이 혼례 치르는 초저녁에
폐백으로 받은 밤송이를 가랑이 사이에 두고
가시가 찌르는 줄도 모르고
가시네 가이네 계집애 온갖 여자들이
가랑이 사이에 뜨거운 쇠붙이를 넣고
전쟁을 향해 돌을 던진다 돌을 던진다 돌을 던진다
임진년아 병자년아
소녀들아, 소녀들아 작고 여린 꽃잎들아
화냥년아 잡년아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디리놓나,
꿈들이 밤마다 설치류처럼 치맛자랏을 쏠고
베냇저고리 젖내를 풍기며
소녀들아, 소녀들아 작고 여린 꽃잎들아
달이 빠진 우물에 뚜껑이 덮이고
미망의, 아직 죽지 못한 여자들이
흰 버선 신고 훨훨훨 널뛰기를 한다
금순아, 연순아
죽음 다음에야 이름 불리는 여자들이
대바구니 철철 피었다가 지는 여자들이
- 나의 아름다운 캐릭터(상상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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