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베트남 기행 마지막 편 : 힘겹고 힘겨운 평화 그리고 더 힘겨운 평화기행 - 평화를 마주하다_림민(회원)

 

논길을 따라 멀리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바로 그곳에 퐁니 퐁넛 마을 민간인학살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드넓은 논 한가운데 하얀 비각이 나타났다. 멀리 마을이 듬성듬성 보인다. 비각 속 위령비 바로 옆에 두 그루의 야유나무가 있다. 그 가운데 한 그루는 수령이 족히 300년은 넘은 듯하다. 오래 된 야유나무는 한국의 당산나무와 같단다. 그 나무 바로 옆에 제단이 있다. 위령비 앞 비문에는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야유나무에서 남조선군대에 의해 74명의 인민이 학살당했다. 1968년 2월12일(음력1월14일)’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희생자 74명의 명단이 위령비에 각인돼 있다. 이 위령비는 2004년 한국의 평화인권단체인 ‘나와 우리’ 회원이 이곳 지역민의 요청으로 1천여만원의 성금을 모아 베트남청년과 함께 건립했다. 처음엔 위령비만 세웠으나 주민이 길을 포장하고 비각까지 세웠다고 한다.

 

미리 준비해간 술을 제단에 올리고 향에 불을 붙여 피운다. 그리고 잠시 묵념. 머릿속을 온갖 생각들이 휘젓는다. 이 평화롭기 그지없는 마을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대체 그들은 왜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학살한 것일까. 책에서 보았던 그 끔찍한 사진들이 끊임없이 떠오르고 또 떠오른다. 오소소 소름이 돋으며 웬지 모를 두려움과 분노에 도저히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다.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바람에 일렁이는 야유나무를 바라본다. 300년 가까이 이 자리에 서있다는 저 나무는 모든 걸 알고 있을까.

 

우리의 방문을 알고 미리 위령비로 마중 나온 마을대표(우리로 치면 마을 이장쯤이려나)의 안내를 받아 당시 학살사건 생존자 중 한 명인 ‘응우예티탄’ 씨의 집을 방문할 차례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집은 바로 이 1번 국도 대로변에 위치해 있다. 1968년 그날, 그렇게 한국인에 의해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입었던 그녀가, 멀리 한국에서 찾아온 우리를 온화한 미소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땀 흘리는 우리들을 위해 시원한 차와 음료를 기꺼이 내어주었고, 싫은 기색 없이 진심으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당시 여덟 살에 불과했다. 그날은 1초가 1분, 1분이 10분처럼 느리게 갔다. 필름처럼 기억이 또렷하다. 아버지는 전쟁 전에 사망했다. 오빠는 10세, 동생은 3세였다. 엄마는 형제자매를 이모에게 맡기고 시장에 물건을 팔러갔다. 갑자기 마을에 폭격이 시작됐다. 이모는 그들을 데리고 방공호로 갔다. 한국 군인이 ‘다 나오라’고 하면서 최루탄을 던져 방공호 밖으로 나왔다. 군인은 우리를 일렬로 세운 다음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젖먹이를 안고 있던 이모가 즉사하고, 오빠는 엉덩이가 날아가 버린 채 쓰러졌다. 세 살짜리 동생이 입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녀도 배에 상처를 입었다. 오빠가 그녀를 불러 엄마를 찾자고 했다. 동생을 버린 채 오빠는 엉금엉금 기어갔고 그녀는 그런 오빠와 함께 ‘엄마’를 부르며 마을을 헤맸다. 대부분의 집이 불에 타고 마을길에 시체가 널브러져있었다. 불에 타지 않은 어떤 집에 들어가 ‘엄마’를 외치는 순간 한 주민이 나타나 그녀를 병원으로 옮겼다. 그녀는 상처가 덜해 다낭병원으로 후송되고 오빠는 독일의료수송선으로 옮겨졌다. 전쟁이 끝난 1975년에 오빠와 해후했다. 오빠는 성불구자가 됐으며 그녀는 숙부 집에서 자랐다. 나중에 학살사진이 공개되면서 그 시신더미 사진 속에 그녀의 엄마가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묻고 싶다. 도대체 왜 엄마와 동생을 죽였는지... 얼마나 고생하며 살았는데...

 

떠나기 전, 그녀에게 웃고 있는 당신의 얼굴을 사진으로 담고 싶다고 정중하게 부탁하자 그녀가 흔쾌히 승낙을 해주었다. 한국에 돌아가 사진을 현상해서 보내주겠다고 말하니, 대뜸 혹시 우리 일행 중 그림 그리는 사람이 있느냐고 되묻는다. 사진보다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간직하고 싶다면서. 그래서 그녀에게 약속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꼭 당신의 초상화를 그려 보내주겠노라고. 내 약속이 마음에 들었던지, 그제야 카메라 앞에서 수줍고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것으로 베트남 평화기행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