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행들과 버스를 타고 다낭에서 후에로 향한 것은 오후 두 시경이었다. 호텔을 나와 환전을 하고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친 후, 아침에 미리 찾아가 위치를 파악해둔 매표소에 도착해 근처 카페에 앉아 음료를 마시며 후에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우리를 후에로 실어다 줄 버스가 일반 버스가 아닌 침대버스란다. 침대버스라니... 버스에 침대라도 달려있단 말인가? 한국에서도 타보지 못한 침대버스를 베트남에서 타보게 될 줄이야. 버스 출발 시간에 정확히 나타난 그 침대버스는 내가 예상했던 것만큼 특이했다. 일단 모든 승객들이 신발을 벗고 탑승해야 한다는 게 특이했고, 1층 2층으로 구분하여 빼곡하게 들어찬 비스듬하게 누운 좌석들은 마치 라꾸라꾸 침대를 버스 안에 잔뜩 설치해놓은 것 같았다. 이 낯선 버스에 누워(?) 후에로 향하는 그 세 시간 반은 참으로 행복했다.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베트남의 낯선 풍경들을 감상하며, 지금껏 말로만 들어왔던 그 후에 라는 도시가 대체 어떤 모습으로 내 눈 앞에 나타날까를 상상했다.
후에는 한국으로 치면 경주 같은 도시라고 할 수 있다. 150년간 응우옌왕조의 도읍지였고 베트남 근대사의 화려했던 문화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베트남 중부 여행에서 후에를 보지 않고 온다는 것은 신라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에서 경주를 보고 오지 않는 것과 같다.
후에는 수도 하노이와는 540 km, 베트남 최대도시인 호찌민 시와는 644km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베트남은 역사, 문화적으로 북부와 남부가 서로 별개의 과정을 거쳐 왔는데, 북과 남을 가르는 기준점이 바로 후에 이다. 현대에는 베트남전쟁 최대의 유혈 전투였던 후에 전투가 벌어지는 현대사의 무대가 되었다.
1968년 1월 30일, 베트남 인민해방군(월맹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합작한 베트남 전쟁의 운명을 결정지을 테트 공세(구정대공세)가 남베트남 전역 41개의 도시에서 일어난다. 동양의 대부분의 국가가 그렇듯이 구정(설날)은 가장 큰 명절이었고, 1967년까지만 하더라도 북베트남(월맹)과 남베트남(자유월남)은 이시기에 일시적으로 휴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월맹은 이것을 역이용하여 베트콩과 합작하여 자유 월남을 점령하기 위해 테트 공세를 일으킨다. 물론 이 구정대공세는 월맹의 완패로 끝났다. 월맹은 참전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3만5000여명이 사살됐고 5800여명이 생포됐다. 반면 미군의 손실은 전사자 534명, 부상자 2547명에 불과했다. 이 암묵적인 휴전기간에 철저한 방어준비를 한 군대는 아이러니 하게도 주월 파병 한국군이었다. 공산군들은 테트 공세 중 월남 내 주요시설물과 기관을 습격했다. 당시 주월 한국군 사령관 관저에도 월맹군 50명이 기습했으나 비상대기 중이던 한국군 병사들에게 전멸당했다. 월남 대통령궁에도 베트콩들이 기습을 했으나 마침 대통령 관저에서 50여m 떨어진 한국 대사관을 경비하던 한국군 소대원들이 교전을 벌여 이들을 격퇴시켰다. 대통령궁을 지켜낸 한국군은 월남 대통령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 되었으며 당시 소대장은 이 전투의 무공으로 화랑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테트 공세 첫날 하루 동안 한국군은 적 440명을 사살하는 개가를 올렸다.
하지만 그 용맹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쟁 중 대량학살사건은 현대사의 일대 오점으로 남았다. 베트남 전쟁을 추악한 전쟁으로 만든 최대 주범은 한국군이었으며, 그 배경은 전무후무한 대량학살사건이었다. 미국은 미라이학살사건뿐이지만 한국군은 베트남 전지역에서 약 100여곳, 추산 1만명에서 3만명에 이르는 대량학살사건을 저질렀다.
빈안학살은 수많은 한국군에 의한 학살사건 중에서도 가장 대규모의 학살사건이다. 빈안 주변, 15곳의 마을에서 1966년 1월 23일부터 2월 26일까지 1,004명의 농민을 학살했다. 이 희생자 중에는 불과 1시간에 380명이 살육된 고자이학살도 포함되어있다. 유명한 스페인의 게르니카공습 희생자가 1,600명이다. 베트남의 일개 지방 한 곳에서 벌어진 빈안학살이 얼마나 대규모였고 잔학했는지 알 수 있다.
한국군은 여자, 어린이, 노인 등 약자를 중심으로 살육을 벌였다. 특히, 여성과 어린이가 압도적이었다. 여성을 강간하고 임산부는 배를 갈랐다. 어린이는 0세부터 10세미만이 많다. 목을 베고, 손발을 절단하고 불구덩이로 던지는 등 상상할 수도 없는 잔학행위를 저질렀다. 이것은 생지옥이며, 현대의 게르니카였다.
오소소 소름 돋는 한기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너무 강한 버스 에어컨 탓인지, 아니면 너무나 끔찍한 악몽을 꾸었던 탓인지... 눈을 부비며 버스 창밖을 바라보니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졌던 모양이다. 거리는 온통 젖어있고 어둑해진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하다. 버스는 이름 모를 낯선 거리를 한참동안이나 서행하다 이내 멈춰 섰다. 드디어 후에에 도착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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