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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평화기행/2016년~2021년

<후기> 베트남 평화기행 두 번째 : 힘겹고 힘겨운 평화 그리고 더 힘겨운 평화기행 다낭 편_림민(회원)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19. 10. 22.

 

... 이런 쒸벌!” 인천공항에서 세 시간 반을 날아와 베트남 다낭 국제공항에 도착해 출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내 입에서 터져 나온 첫마디가, 불경하게도 욕설이었다. 그 말로만 듣던 동남아 열대기후란 것이 바로 이거였구나. 12시를 훌쩍 넘은 시간인데도 한국의 8월 한 낮 찜통더위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다. 공항을 빠져 나온 지 십 분이 채 되질 않았는데 벌써 온 몸이 땀범벅이다. 이제 겨우 6월 초밖에 되지 않았건만, 여름의 한복판인 8월의 베트남은 도대체 얼마나 덥고 습하다는건지....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는다. 서둘러 공항 앞 대로변에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 기사들에게 다가가 흥정을 시작했다.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공항을 벗어나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예약된 호텔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다낭 국제공항은 다낭의 서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시내까지 거리가 3밖에 되질 않는다. 우리가 묵을 호텔은 한강(汗江: Song Han)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 서울의 그 한강과 발음이 같다. 일행들과 택시를 타고 십여 분 달려가다보니 조명이 화려한 한강 다리의 용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다리 전체를 용이 꿈틀거리며 지나간다. 택시기사가 어눌한 영어로 <용교>라고 설명해준다. 길이 666m, 37.5m의 왕복 6차선 다리다. 이 다리 바로 앞에서 동쪽으로 좌회하여 고층건물들이 즐비한 시내 대로변으로 3분쯤을 더 달려가니 우리가 미리 예약해 놓은 <SNOW WHITE> 호텔이 보인다.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고 각자 배정받은 방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와 침대에 몸을 뉘우니 새벽 두 시가 훌쩍 넘었다. 10층 호텔방 창문 밖으로 다낭 시내의 야경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결코 서울처럼 화려하지 않은, 소박하고 절제된 느낌으로 도시 곳곳에 퍼져 있는 불빛들이 이상하게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렇게 한 참 동안 멍하니 다낭의 야경을 바라보다, 문득 강곤형님이 궁금해졌다.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까.
결국 강곤 형님은 우리와 함께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무비자 재입국은 베트남 입국 후 출국한 시점으로부터 최소 30일 이후 비로소 재입국 할 수 있다는 규정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는 서둘러 식당에 모여 앉아 긴급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유일하게 베트남어를 구사할 줄 알기에 일행들의 가이드 및 통역을 맡아준 강곤 형님을 홀로 두고 비행기를 탈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여행을 포기할 것인가. 장고 끝에 내린 결론은 우리가 먼저 비행기에 오르고, 강곤 형님은 인천에 남아 여행사를 통해 비자를 구해서 하루 늦게 베트남 <후에>에서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우리는 강곤 형님을 홀로 한국땅에 남겨 두고 베트남으로 날아왔던 것이다. ... 불쌍한 강곤 형님.


아침 일찍 우리는 호텔을 나서야 했다. 할 일이 꽤나 많았다. 일단 호텔 근처 은행에서 전날 인천 공항에서 환전한 달러를 다시 베트남 돈으로 환전해야 했고, 또 미리 예약해 놓은 <후에>행 버스 티켓 확인을 위해 매표소를 찾아나서야 했다. 호텔 식당에서 간단한 조식을 마치고 일행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 한 팀은 은행에서 환전을 하기로 하고, 한 팀은 매표소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나와 은규형님, 순결형님이 매표소를 찾아가보기로 결정하고 호텔을 나왔다. 호텔 직원에게 매표소의 정확한 위치를 물으니, 전날 택시 안에서 보았던 용다리를 건너가야 한다기에 우리는 천천히 용다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베트남의 아침 거리 풍경은 전날 밤의 풍경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일단 귀를 찢을 듯한 오토바이 소리에 압도된다. 대체 이 많은 오토바이들이 어디서 쏟아져 나왔을까. 도로를 가득 메운 다양한 오토바이들을 구경하느라 눈이 바쁘다.
뜨거운 햇살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용교를 건넌다. 다리 중간에서 북쪽을 살펴보니 또 다른 다리가 보인다. 투안푸옥 다리라고 한다. 투안푸옥교는 중국의 기술진에 의해 20097월 완공되었는데, 엔지니어링 기술의 부족으로 통행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길이가 1850m나 되는 대형다리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이 다리는 한강이 바다와 만나는 강 하구에 있어 다낭 구시가와 송트라(Son Tra) 반도를 연결해준다.
다리를 건넌 우리는 잠시 더위를 피해 강변에 있는 어느 카페의 야외 테라스 그늘 아래에 엉덩이를 붙였다.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얼음 넣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키니 천국이 따로 없다. 강의 서쪽 다낭 신시가지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또 우리가 건너온 용교의 모습도 아주 가까이 보인다.
날씨가 덥기는 하지만 우리는 잠시 강변 테라스로 나와 한강을 살펴본다. 한강은 쾅남(Quang Nam) 지역을 흐른 다음 다낭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다낭만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어 항구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동안 미군의 해군기지가 이곳에 설치되었다. 베트남 전쟁 동안 베트남 중부로 들어오는 모든 인원과 물자는 모두 이곳 다낭 항으로 출입했다고 한다. 우리 청룡부대도 역시 다낭 항으로 들어왔다.
다낭 항은 현재 베트남에서 세 번째로 큰 항구다. 남쪽의 호치민 시티에 있는 사이공 항이 가장 크고, 북쪽 하노이의 외항 역할을 하는 하이퐁 항이 두 번째로 크다. 다낭 항은 연간 300t의 물동량을 처리하고 있다. 그 중 절반이 수출이며, 나머지 절반이 수입과 국내 운송이다. 최근에는 크루즈선도 들어오고 있다. 다낭 항은 18세기까지는 시골의 조그만 항구에 불과했다. 그때까지 베트남 중부 물류의 중심지는 다낭 남쪽에 있는 호이안 항이었다. 호이안에는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선박들이 드나들었고, 중국과 일본 상인들의 거주 지역까지 있었다.
다낭이 세계적인 항구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1787년 지아롱(Gia Long) 황제가 프랑스 루이 16세와 조약을 맺으면서 다낭 항을 프랑스에 할양한 때부터다. 그리고 1835년 민망(Minh Mang) 황제가 다낭을 제외한 모든 항구에 유럽 선박이 정박할 수 없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1847년과 1858년에는 베트남의 기독교도가 박해를 받는다는 이유로 다낭 항을 폭격하고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후 1954년까지 다낭과 항구는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름도 투랑(Tourane)으로 불리게 되었다.
1900년대 다낭은 하노이, 사이공, 하이퐁, 후에에 이어 다섯 번째 도시가 되었다. 1954년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가 끝나면서 베트남 중부의 가장 중요한 항구로 발돋움하기 시작했고, 베트남 전쟁을 통해 그 중요성이 훨씬 더 커졌다. 왜냐하면 미군의 공군과 해군기지가 이곳에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다낭은 남북 베트남의 경계인 북위 17도선 아래인 16도선에 위치하고 있고, 대형선박이 드나들 수 있는 넓은 항구를 가지고 있었다. 19728월 베트남 전쟁의 지상전투가 끝나면서 다낭은 군사항에서 다시 무역항으로 그 역할을 전환하게 되었다. 그 후 다낭은 베트남 중부의 경제와 물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현재 다낭에는 기계, 전기, 화학, 조선, 직물 등 제조업도 발전하고 있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부산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맥주로 몸을 식혔으니 본격적으로 매표소를 찾아가야 했다. 카페 점원에게 매표소의 위치를 다시 한 번 물으니, 아뿔싸! 매표소는 다리 건너편에 있단다. 분명 호텔 직원이 매표소는 다리 건너에 있다고 했건만! 뜨거운 땡볕을 견디며 다리를 건너온 것이 헛고생이었다니! 내 짧은 영어실력이 들통이 나버린 순간이다. 그래도 함께 동행한 은규형님과 순결형님이 푸하하 웃어 주신다. 우리는 이 곳에 앉아 맥주 한 잔 시원하게 마시고 갈 운명이었는갑다 하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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