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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마음거울

<제59호> 소욕지족(少欲之足)_이영희 회원(청주 원영한의원)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19. 10. 23.

 

엄마, 꽃 한 다발 사서 책상에 놓고 싶어요.”

아이가 했던 말이 생각나 산책길에 꽃집에 들러 프리지아를 샀다.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한 가득이다. 씻어둔 소스 병에 꽃을 담는다. 은은한 향기는 물론이거니와 초록과 노랑 빛이 주는 사랑스러움은 또 얼마나 크던지. 2주 동안 꽃으로 인해 가족 모두가 행복했다. 요즘 아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갖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돈이 없어서 못 산다면 무척 서러울 텐데, 지금은 사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까 오히려 여유로워지는 거 같아요. 이젠 콘서트나 연극 보러가는 게 부담스럽지 않아요. 난 그 정도 호사는 누릴 만 하니까요.”

 

아이가 간결한 삶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가을부터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돌발성 난청>으로 4개월 정도 요양을 해야 했다. 소리에 예민해지니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외출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어 하루를 온전히 집에서만 보내게 되었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다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주어지니 아이는 많이 힘들어 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며 우울해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한권이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미니멀리즘을 표방하는 책이었다. 아이는 그 날부터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제일 먼저 한 것은 옷 정리였다. 사실 아이의 옷장은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을 만큼 옷이 넘쳤다. 영어 과외로 적지 않은 돈을 벌었는데, 그 돈의 대부분을 옷을 사는데 썼기 때문이다. 옷을 바닥에 전부 늘어놓고 보니 중복되는 스타일도 많았고, 목이 늘어나거나 얼룩이 묻은 옷, 깨끗하긴 하지만 유행이 지난 옷, 새내기 때는 예쁘다고 입었으나 지금은 민망해 입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정작 아이가 즐겨 입는 옷은 몇 벌 되지 않았다. 아이는 자기가 구입했던 옷의 양에 놀랐고, 옷이 많아질수록 입을 옷이 없다고 투덜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책, 사진, 앨범, 인형, 잡동사니 물건 정리로 이어졌다. 추억은 가슴에 품는 것이라며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들의 사진을 정리하고, 교지에 실린 자기 글을 보며 옛날 기억에 수다를 늘어놓기도 했다. <곰돌이 푸> 덕후인 딸은 푸 인형 몇 개만 가지고 있기로 했다. 정리한 물건들은 기부할 것, 나눠줄 것, 버릴 것으로 나눠서 처리했다. 아이는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꼭 필요한 물건만으로 방을 채웠다. 그렇게 하니 7칸을 가득 채웠던 사계절 옷은 1칸 반으로 줄었고, 좁게 생각되던 방이 두 배쯤 넓어졌다. “엄마, 난 그동안 예쁜 쓰레기만 샀던 것 같아요.” 정말 그랬다. 필요에 의해 산 물건보다는 갖고 싶은 욕심에 사들였다가 결국 사용하지도 않고 먼지만 쌓인 채 방치되었던 물건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이제 아이는 물건을 살 때마다 고민을 한다. 정말 필요한 건가,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주변에 없을까? 그러면 열에 아홉은 사지 않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아이는 예전에 비해 소유한 물건은 턱없이 줄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한없이 넉넉해진다며 신기해 했다.

 

사람은 얼마나 소유해야 행복하다고 느끼는 걸까? 이제 나는 많이 소유하는 것과 행복한 것은 꼭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걸을 때, 일요일 아침 가족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함께 할 때, 아이들과 목욕탕에서 서로 등을 밀어줄 때, 불어오는 바람에 빨래가 살랑거리며 흔들릴 때. 행복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소유해서 느끼는 만족감은 일상의 소소함에서 느끼는 만족감을 이길 수가 없다. 소욕지족(少欲之足). 내가 이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데 40년 넘는 세월이 걸렸는데, 아이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삶의 한 형태로 이것을 받아들였다는 게 참 기특하다. 부족함으로 삶을 채우는 지혜. 우리의 삶이 그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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