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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마음거울

<제57호> ‘떼이야르 드 샤르댕’ 그는 누구인가_?정태옥(회원)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19. 10. 23.

 

붓다. 공자. 예수의 공통점은 물질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생물에서도 일어나고 인간에게도 일어난다.” 소멸되는 생성즉 사회성이다. 인간에 대한 정의가 붓다는 전체는 압축되고 제한된 전체의 부분으로 구성된 부처이다.” 라고 설파하셨으며, 예수는 인간은 의 아들이다.” 이라 가르치셨다. 그들의 가르침은 사상이 아니라 올바른 삶 자체이었으며, 붓다와 공자는 당시 상류층 신분이었기에 그의 가르침에 별 저항이 없이 동양에서는 2500년 간 붓다와 공자의 말씀을 생활화함으로써 나보다 우리라는 의식 속에 삶을 영위해 왔다. 그러나 예수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삶 자체와 가르침에 심오한 우주의 본질을 나타내고 있어 예수, 그는 누구인가?”가 그를 따르는 자들이 언제나 떨쳐버리지 못하는 의구심이었다.

 

7천 년 전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 유역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 인들에 의해 메소포타미아 일대 원주민들에 의해 구전되어 온 창조설화길가메시 서사시로 전해졌고, 바빌로니아 유배에서 풀려 유다로 돌아온 히브리인들에 의해 구약의 창세기에 기록함으로써 오늘날 가톨릭(기독교) 신앙의 원전이 되었다. 히브리인들에게 현세는 낙원에서 쫓겨난 실낙원으로서 언제인가는 구세주 메시아를 통해 낙원으로 되돌아가리라는 구원관을 갖고 있었다. 그들에게 구원은 개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타락한 현세의 구세주 메시아를 통한 세상의 구원이었다. 그들의 후손 중에 예수라는 한 인간이 태어나 히브리인들의 기존 구세주 메시아를 통한 구원관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이렇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구세주 메시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류의 공유성에 의해 완성된다.”

 

공유성이란 정적인 세계관에서는 어느 하나를 여럿이 이용한다는 의미이지만, ‘동적인 세계관에서는 여럿이 하나를 만드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완성구세주 메시아를 통한 완성으로 신앙해왔고, 예수는 인류의 공유성을 강조함으로써 결국 그들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말았다. 당시 제자들의 의식 수준으로 예수의 삶이 인간의 삶임을인식하지 못했다. 예수의 직접 제자는 아니지만, 오늘의 가톨릭(기독교)이 있게 한 바오로에 의해 예수를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정의 되었고 믿음의 대상이 되었다. ‘예수의 삶이 인간의 삶임을인식한 일부 제자들은 교회에 흡수 되거나 소멸되고 말았다

 여기에 5세기 이후 스콜라 철학(가톨릭 신학)이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의 현상을 인식하는 이원론과 프라쇼케레티(Frashokereti)라는 2단계 종말론 부활론과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를 존재로 인식하여 예수의 가르침을 해석함으로써 예수의 본 모습은 어디가고 독생 성자 그리스도만 남아 1천여 년 간 서양인의 사고를 정지시켰다. 물론 이 시대는 인류 전체의 사고가 정적인 세계관이었기 때문에 사고의 정지가 유독 서양에만 있던 현상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 사고를 오늘날에도 인류 전체에 설파하고 있다는 데 있다.

 

서양인들에게 동적인 세계관으로 인식의 전환은 16세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비롯하여 갈릴레오, 뉴턴, 등 천체물리학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서양인들의 사고는 18세기에 와서야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가 명사가 아니라 동명사일지도 모른다는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신학에서가 아니라 유물론에서부터 왔다. 특히 라마르크와 찰스 다윈의 생물 진화론은 인류가 정적인 세계관에서 동적인 세계관으로, 현상을 인식하는 이원론에서 일원론으로 의식의 전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늘날 인류와 침팬지의 DNA 염기서열이 겨우 1.6% 차이로 침팬지는 동물원의 쇠창살에 살고, 인류는 우주의 주인인양 활개 치며 살아가고 있다. 1.6% 차이에 인류의 문화, 문명이 있다. 지구상에 인류가 출현한 이래 수만 개의 문화, 문명이 소멸하고 발생했다. 이 인류의 유산은 DNA가 아닌 정신권을 형성하여 사회유전 되었으며 생성, 성장, 소멸을 반복하면서 보다 복잡한 사회구조와 인류의 성장을 이끌어 왔다. 오늘날 철학 ,신학, 사회과학 등 인문학으로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예수회 사제이면서 지질학, 고생물학, 고인류학자인 떼이야르 드 샤르댕만이 과학과 종교의 화해와 결합을 위해 평생을 받친 분이었다. 지금까지 샤르댕의 사상을 바탕으로 생명과 정신의 세계를 살펴보았지만, 아직도 가야할 길이 먼 길임에는 틀림이 없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샤르댕 사상에 관심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썼을 뿐 온전히 그 분의 사상을 전했다고 생각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지면을 할애해 샤르댕 사상을 소개하게 해준 인권연대 이은규씨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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