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어른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자신의 죽음에 관해 깊이 생각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행복에 겨워 삶이 밝다가도 절망의 심연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라는 침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당황을 넘어 비통에 빠져 무기력을 실감합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가 영생(내세)을 강조하고 있어 영생은 소망이 아니라 실재라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은 살아서 가는 곳이 아니라 죽어야 가는 곳으로 믿고 있어, 우리는 죽음에 관해 세 가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영생은 소망인가? 아니면 실재인가? 이고, 다른 하나는, 영생이 실재라면 죽어야만 가는 곳인가? 아니면 살아서 가는 곳인가? 입니다. 만약 살아서 가는 곳이라면 왜 인간은 죽어야 합니까? 여기에서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참으로 우리에게 죽음이란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인간의 죽음, 부활, 저승(천당과 지옥), 영생, 내세 등 종교에서 사용하는 이 신앙의 언어가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 또한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소수의 사람만이 계시나 깨달음을 통해 ’영생‘을 인식했지, 대부분 사람들이 ’영생‘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거나, 신앙을 통해 내세를 믿고 있습니다. 결국 내세란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소망‘이거나 ’실재‘의 세상일 텐데, 죽음에 대한 확실한 정의를 전제하지 않고는 내세를 정의하기가 불가능하리라 생각이 됩니다. 우리에게 죽음만큼 인간의 본질을 묻는 질문도 없기 때문에 죽음은 모든 철학과 종교의 출발점이며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현상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없었던 시대에서 죽음의 의미가 ’현세와 완전히 단절‘ 외는 어떤 현상도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죽음에 관한 신앙의 언어가 영생을 설명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죽음이란 생물학 영역이지 철학이나 신앙의 영역은 아닙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서 죽음에 관한 정의는 철학이나 종교의 영역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내세에 관한 신앙언어가 매우 관념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불확실성일 수밖에 없어, 모든 종교가 내세(영생)에 관해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믿음은 결심인데, 내세(영생)가 결심여하에 따른 존재일가요?
古代인들이 언제부터, 어떻게 ’영생‘을 인식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약30만 년 전에 출현하여 약3만 년 전에 멸종된 인류의 한 종인 독일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의 매장풍습에서 그들의 ’영생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 매장풍습에서 꽃다발로 장식하고 죽은 이들이 평소에 사용하거나 소중하게 간직했던 뼈 장식품이나 석기가 함께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고구려 적석총에 비해 그 규모가 다를 뿐 죽은 이들의 영생을 기원하는 매장풍습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약138억 년 전 ’빅뱅‘ 이후, 적어도 지구상에서는 물질에서 생명이 출현하는데 약100억 년이나 걸렸습니다. 다시 이 생명에서 정신(인간)이 출현하는데 약40억 년이 걸렸습니다. 따라서 생명은 물질세계의 내세이었으며, 정신(인간)은 생명의 내세이었습니다. 또 다시 40억 년 후, 정신(인간)은 어떤 모습이 될까? 상상을 한번 해보십시오! 바로 우리 인류의 내세를 말입니다. 古代人들로부터 인식해온 내세(영생)가 상상이나 희망사항이 아니라 실재이었던 것입니다.
과학이 없던(모르는) 시대에 죽음은 ’현세의 단절‘로서 ’죽은 시체의 연속성‘을 인식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내세(영생)를 인식해온 古代人들은 단절(죽음)과 연속성(영생)을 하나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영혼이나 저승을 설정하였을 뿐입니다. 영혼은 곧 ’죽은 시체의 다른 존재‘이었으며, 저승은 현세와 다른 비물질 세상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렇다고 古代人들이 바라던 ’영생‘이 저승이 아니라 현세임을 그들의 부활사상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은 저승에서의 새 삶이 아니라 현세로 되살아납니다.
생물학에서 영생은 ’생명의 불멸성‘이며, 부활은 ’생명의 연속성‘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물질, 생명, 정신이 형성되는 하나의 연속된 존재로 인식한 사람들은 히브리인, 한민족, 예수. 18세기–19세기 유물론자들 그리고 ’떼이야르 드 샤르댕‘입니다. 만약 누구든지 생명은 물질이 획득한 ’불멸성‘임을 안다면, 내세(영생)의 의미를 보다 쉽게 알알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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